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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ul 29. 2022

정치 9단 vs 정치 10단

국민 앞에선 정치 초단이다.

  프로 바둑에서 품계는 초단에서 9단까지 구분한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지닌 9단의 품계를 받으면 더 이상 올라갈 때가 없다. 2022년 7월 기준으로 한국기원에 등록된 프로기사 406명 중 9단은 98명(24.1%)이었다. 9단을 최종 품계로 하는 것은 십진법상으로 숫자 '10'을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완벽한 수로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10에서 1이 적은 9를 인간의 세계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수로 삼았던 것이다(김동선, 2016). 프로바둑에서는 고단자가 저단자 간에 실력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저단이 고단을 이기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1972년 5월 5일, 만 19세의 서봉수 2단이 당시 한국바둑계의 지존 조남철 8단을 꺾고 명인(名人)을 쟁취했다. 냉혹한 프로의 승부 세계에서 욱일승천의 저단 기사가 노회한 고단의 기사를 꺾는 것은 그리 큰 사건은 아닐 것이다. 바둑에서 나이 40은 2선에서 후배 기사를 양성하는 코치나 지도사범이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프로기사의 승단은 승점제 방식으로 운영되며 일정한 점수를 채우면 승단한다. 특별히 세계대회에서 우승할 경우에는 9단으로 승단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두어 동기 부여를 하고 있다. 


  반면 프로바둑과 아마바둑은 실력 차이가 두드러진다. 아마 최고수도 프로에겐 잘하면 흑 정선으로 두거나 두 집은 깔아야 균형이 맞는다. 저자도 한국기원 아마 6단이지만 프로 9단과 대국에서 4점을 깔고 간신히 이긴 적이 있다. 프로바둑과 달리 아마바둑은 품계에 따라 실력 차이가 난다. 아마 1단과 아마 6단은 상당한 실력 차이가 있어 1단이 6단에게 네다섯 점을 깔고 균형을 맞춘다. 아마 바둑 실력은 개인마다 고무줄 같아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 저자는 아마의 고무줄 실력을 빚대 농담조로 영어 perhaps(아마도)를 사용하여 비유하곤 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할 때 정치 9단, 야구 9단, 요리 9단, 협상 9단 등과 같이 부른다. 우리나라 역대 정치인 중에서도 정치 9단으로 불려지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런 호칭은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표적으로 3김, 즉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정치 9단의 시조 격으로 생각된다. 두 사람은 대통령을 지냈고 한 사람은 총리를 두 번 역임했다. 이들은 당대표가 직업일 정도로 오래했으며 우리나라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즘에는 목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박지원 씨를 정치 9단으로 부른다. 박지원 정치 9단이 방송 등에 출연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거의 정치 예언가 수준이 된 것 같다. 초창기 정치 9단은 대중에게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요즘 정치 9단은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면서 대중들과 가까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로바둑 9단의 실력을 정치 9단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지만, 바둑 품계를 빌려 정치인에게 품계를 붙였으니 비교 불과는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개별적으로 실력은 있지만 정당에 소속되는 순간 그 실력은 집단 논리와 팬덤에 묻혀버리고 만다. 그들은 일반 국민들이 수용할 수 없는 이념이나 진영 논리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80년대 3김처럼 그들만의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인 또는 집단의 이해관계와 권력 쟁취에 여념이 없다. 국민의 더 나은 삶이라든지 선진적인 정치 구현과 같은 것은 선거 때에나 써먹는 약방의 감초가 되었다. 입신 단계에 오른 정치인을 정치 9단으로 부르지만 정치 9단 위에 정치 10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 10단은 국민을 지칭한다. 


  저자는 정치 9단의 역할이 정치 판세를 읽어낸다든지 정당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 성마른 판단을 해주는 역할은 아니라고 본다. 국민들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정치 9단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무르익은 정치적 경험과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집단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국익과 국가 통합을 위해 어떻게 어떤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나누는 것이다. 이른 바 정치 9단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받은 자는 statesman, 즉 경험 많고 존경받는 정치인으로서 원칙과 철학을 견지하면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영어로 'A statesman is always a politician, but not all politicians are statesmen.'라는 말이 있다. 모든 정치인이 존경받는 정치인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정치인이 statesman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역사는 설령 정치 9단의 경지에 이른 정치인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국민들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잠시 국민을 호도하거나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정치 10단 국민이 이긴다. 우리나라 현대사가 생생한 증인이다. 60년 4.19, 80년 5.18.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의 촛불 혁명 등은 참다못한 정치 10단의 국민이 나선 것이다. 정치가 배라면 국민은 깊은 대양이다. 대양이 거센 폭풍을 일으키면 배는 전복되고 만다. 정치 10단 국민은 정치 9단이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치를 펼친다는 확신이 서며 그를 위해 홍보하고 투표한다.  


  우리나라 기업은 1류, 정치는 3류라고 한다. 3류 소설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정치인은 후흑학의 대가다. 낯은 두껍고 양심은 오도간데 없고 심장은 웬만큼 충격을 받아도 빨리 뛰지 않는다. 특이 체질이다.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책임감이라든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정치인은 매우 드물다. 왜 정치가 중요한가? 언론에서도 정치뉴스가 왜 1면을 차지하는가? 정치는 개인과 국가와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정치가 가치를 배분하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산실인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선량(選良)들이 모여 법률을 제정하고 행정부를 견제하고 예산을 심의하는 곳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의 근원은 법치이고 법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예산이라고 할 때 법과 예산의 관리감독권은 국회에 있다.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하면 정부는 셧다운이 된다. 삼권분립 체제가 확립된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입법부가 행정부의 수반이면서 집권당 소속의 대통령을 식물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집권당 소속의 대통령이 가장 바라는 바는 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것이다. 집권당이 소수당이라면 국정을 뜻대로 이끌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치권에 대한 혐오감이 심하다. 정치가 하는 일들을 보거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시적인 지표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정치 뉴스만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는 시청자도 꽤 많다. 특히 어린아이들하고 정치 뉴스 보는 것이 교육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많은 비용을 들여 여론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초등학생을 모아놓고 집에서 부모가 어떤 후보가 나오는 채널을 관심있게 시청하는가를 알면 가장 신뢰도가 높은 여론조사결과가 될 것이라고 한다. 국회의원들끼리 멱살 잡고 고성을 지르며 욕하고 육탄전을 벌이는 광경을 누가 보고 싶겠는가. 그러면서도 국민의 혈세로 책정된 세비는 꼬박꼬박 챙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치인들에 대해 관대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역사는 정치 10단에게도 임계치가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발 언론이 정치 10단 앞에서 9단 운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형국에 교만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국민 앞에서는 모든 정치인이 정치 초단이고 신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statesman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한다.


  

김동선. (2016). 아시아경제. <[숫자 9의 비밀] 神앞에 겸손해진 인간의 수 '9'> .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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