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Aug 10. 2022

아버지의 유산

당신을 그리며 닮으며 

8월 이맘쯤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진다. 아버지는 한여름에서 초가을의 문턱을 넘던 2015년 8월 29일 저녁 10시경에 별세하셨다. 향년 96세였다. 어머니가 별세한 지 2년 뒤였다. 이로써 저자는 엄부자모(嚴父慈母), 즉 엄한 아버지에 자애로운 어머니와 이별했다. 말이 이별이지 부모님을 가슴에 묻고 항상 함께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리움을 양으로 누적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 적을 것이다.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니는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길거리에서도 연구실에서도 환하게 웃고 계신다. 간혹 꿈속에서도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시고 어쩔 때는 모습만 보여주시고 사라지곤 하신다. 희한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꿈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꿈으로는 보여주시지 않았다. 부모님을 꿈에서 보면 며칠 동안 기분이 좋은데 꿈에서도 엄부자모인가 싶다. 그리움의 양으로 따지면 아버지가 서운해할지 몰라도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남겨주신 값없는 거룩한 유산이 저자의 혈관을 타고 다니며 말초신경에 이르기까지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버지와 관련하여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시작하자. 중학교 2학년으로 생각된다.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당황해하시면서 막내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하셨다. 저자는 그동안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저자를 다리(橋)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고 동네 친인척에게도 확인했다는 점, 형들의 이름은 돌림자인데 나만 그렇지 않다는 것, 형제들도 눈치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 등등의 말씀을 드렸다. 이런저런 말을 들은 아버지는 파안대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태어났을 때 하도 순둥이로 생겨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부족한 쌀을 팔아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었다.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낳은 귀한 자식이다. 네가 그런 오해를 하게 하였다니 미안한 일이구나. 다리 밑 운운하는 것은 어린애에게 하는 농담이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자는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어른들의 말을 흘러 보내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적당한 시기를 보아 집을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사춘기의 민감했던 시절에 일어난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저자는 매우 심각했다.

 

8월 기일에 맞춰 형제들과 참배를 하기 위해서는 미리 벌초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뜻 아버지가 저자에게 남겨주신 유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라서 그런지 저자에게 물려주신 유산이 참 많았다. 양파 껍질처럼 하나를 생각하면 연달라 또 다른 생각이 줄을 이었다. 유산은 유형적인 것과 무형의 정신적인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은 주로 무형적인 것이다.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어 몇 가지만 정리해본다. 


첫째, 아버지는 덕을 많이 쌓았다. 덕승재(德勝才)다. 공자도 덕을 강조하여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즉 '덕'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집은 할아버지부터 접골(接骨), 뼈를 맞추는 가문이었다. 아버지 역시 접골 능력이 뛰어나셨다. 동의보감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개구쟁이 시절 뼈마디 한두 군데 부러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싶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고로 뼈는 금이 가거나 부러지기 십상이다. 집 앞에 접골원이라는 간판만 내걸지 않았지 지역은 물론 광주에까지 소문이 났다. 대중교통이 발달되지도 개인 승용차도 일반화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환자를 업고 왔다. 아버지는 바쁜 일상에서도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완쾌시켰다. 어떤 환자는 집에 온 지 몇 분만에 손이나 발이 정상으로 돌아왔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며칠을 집에서 지내면서 치료를 받았다. 환자 보호자는 답례의 표시로 소주, 담배, 계란 등을 내놓았다. 보호자들은 아버지가 애주가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주로 술을 가져왔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술을 되돌려 보냈다. 우리말에 '받은 것이나 진배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도 생각하면서 주는 사람의 마음도 함께 헤아리셨다.


아버지는 뼈를 맞추는 것 말고도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어 집을 짓고 다리와 도로를 놓는 등 지역과 인근에서 많은 일들을 하셨다. 나주 지석천(砥石川)의 발원지로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화순 이양천의 '둑' 조성공사(하천정비사업)도 아버지의 업적 중 하나다. 지금도 하천 둑을 걸어갈 때면 젊은 시절 아버지의 활약상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고 지금처럼 중장비도 없었을 시절에 사람의 근육에 의지하여 공사를 할 때의 어려움이 느껴졌다. 둑이 조성되기 전에는 여름 홍수철에 하천이 범람하여 천변 농작물이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 어디 농작물 뿐이던가. 하천대로에는 가재도구며 가축이며 사람까지 떠내려갔다. 주민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현장을 지켜보면서 하늘만 원망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둑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자긍심을 가질만도 할 것이다. 형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토목건축으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임금을 주는 날에는 집 앞이 인산인해였고 돈보따리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임금을 체불하지 않았고, '인부'들에게도 하대(下待) 하지도 않았다.


2016년 8월 첫 기일을 앞두고 벌초를 하려고 마땅한 사람을 알아보는 중에 나보다 서너 살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같은 마을에 살지만 성씨가 다른 그가 하는 말이다. "어렸을 적 어르신으로부터 격려를 많이 받았어요. 이뻐해 주시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셔서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벌초는 해드릴게요...." 아버지가 어떻게 사람을 대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은 살았을 적에 베푼 대로 거둔다는 말을 실감했다. 아버지는 지역의 아이들에게도 늘 격려하고 따뜻하게 대하셨다. 그들이 자라 그 은혜를 갚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후배의 말을 듣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렇게 존경스러웠고 나의 아버지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배는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하고 있다. 다재다능하셨던 아버지가 덕을 베풀고 나누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첫 번째 유산은 재승덕(才勝德)이 아니라 덕승재다. 


둘째, 아버지는 기록하여 남기셨다. 아버지는 농촌의 일도 바쁜 법인데 토목건축까지 관여하면서 발이 두 개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힘들고 바쁜 가운데 아버지는 일기를 꼼꼼하게 기록하셨다. 납덩어리 같은 몸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 피곤함을 달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일기를 쓰고 동의보감을 보셨다. 가끔 아버지의 일기를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한자와 한글이 뒤석여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대개 그날의 날씨, 주요 일과에 대해 기록했다. 기분 좋은 날은 시를 짓기도 하셨다. 어릴 적 선잠을 깨어 아버지가 밝음보다 어둠이 더 많은 새벽녁 한 자 한 자 일기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곁눈으로 볼 때면 저절로 나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저자가 일기를 쓰고 기록하여 남기는 습관이 생긴 것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학습동물이다"라고 설파했는데 새벽녘 아버지가 자신만의 삶을 기록하는 습관은 훗날 저자에게도 중요한 습관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학습이 되었다.


셋째, 아버지는 건강관리에 철저하셨다. 아버지의 건강관리는 아버지 혼자만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주불사형인 아버지는 친구 또는 비즈니스 관계로 어울리면서 대취(大醉)하는 일이 많았다. 만약 어머니의 현명하고 헌신적인 내조가 아니었다면 100세 가까운 천수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대취한 아버지에게 반드시 꿀물, 동치미 등으로 속을 달레고 나서 주무시게 했고 다음날 아침에는 생계란에 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드시게 했다. 생계란에 소금과 참기름 혼합액은 저자도 애용하는 숙취해소 식품이다. 저자는 술에 약하지만 간혹 아버지를 생각하며 대취하면 늦은 밤이라도 생계란을 들이켠다.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에서 그렇게 해본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타고난 건강체에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 그대로 타박한 번 하지 않으시고 맛있게 드셨다. 어머니도 항상 아버지의 소탈하고 음식을 가리지 않은 성품을 높이 평가하셨다. 마을에서 단체관광으로 배를 타고 홍도를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뱃멀미에 고생할 때 아버지만은 끄떡없었다고 한다. 이점은 저자가 닮지 않았다. 저자는 비위가 약해 부산에서 오륙도를 가는 배를 3,40분 타고도 멀미를 심하게 하여 응급실 신세를 진 적도 있다. 지금도 어릴 적 먹어보지 못한 음식은 잘 먹지를 못한다. 특히 젓갈 종류는 젓가락이 거의 가지 않는다. 


어느 때인가 아버지의 식습관에 대해 여쭤볼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음식이나 다 잘 드시는데 정말 맛이 있어 그렇게 드세요?" "음식이 다 맛있는 경우가 어디 있다던. 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맛있게 먹는 것이지." 이런 경우를 우문현답이라고 하던가. 아버지는 음식을 만든 사람의 성의를 생각하여 맛있게 먹는 것이 양심 있는 사람이 할 노릇이라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무쇠처럼 강한 아버지는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가시고 큰형 내외의 보살핌을 받던 중 그만 방문턱에 발가락 끝이 부딪혔는데 이 타박상이 다리 괴사로 이어져 3개월 병원신세 지다 돌아가셨다.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면 조그만 상처도 큰 화를 부르는 법이다. 저자도 손이며 발이며 이리저리 다칠 때에는 아버지를 생각하여 소독하고 약 바르고 붕대까지 감아맨다. 유비무환이다.


금년은 아버지와 이별한 지 8주기가 되는 해이다.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 나니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존경스럽다. 작년에 갑을 맞이한 저자는 아버지의 회갑연을 떠올린다. 그날도 아버지는 대취하셨다. 흥에 겨워 한 잔, 친구가 반가워서 한 잔, 자식들이 따라줘 한 잔, 건배사로 한 잔 하다 보니 아무리 술에 강하다 해도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인사불성이 되셨다. 아버지 세대는 회갑연이 마을 잔치였고 생애사적으로도 큰 사건이었다. 저자는 술이 약하다고 하지만 마음먹고 먹으면 꽤 마신다. 그러나 아버지가 빈번하게 대취한 모습을 보면서 절주(節酒)의 미덕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무형의 유산들을 이 아들이 잘 분별하여 삶에 긍정적으로 활용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이다. 아버지를 추모하고 하늘나라에서 어머니와 영생복락을 누리시길... 이번 벌초도 후배에게 부탁을 했다. 후배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반려동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