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Aug 22. 2022

갑(甲)의 귀환

그 갑의 모양이 동그라미였으면...

7년 전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회갑을 맞이했던 1980년 10월 광주와 전남 지역의 분위기는 분노와 절망이 교차했다. 5.18 광주 민중항쟁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된 후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이 틈을 이용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여 체육관 대통령(1980년 9월)이 되었고 우리 사회는 탈법과 독재와 권위주의가 판을 쳤다. 광주의 모든 학교는 5월 중순 휴교 조치가 내려진 뒤 9월에야 교문을 열었다. 다른 지역의 또래 고 3 친구들이 한창 대학입시 준비에 열을 쏟을 때 광주의 학교는 굳게 닫혔다. 광주의 고3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입시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부족했다. 휴교 전에는 본고사를 준비했는데 복교 후에는 본고사가 사라졌다.


80년대만 해도 개인이 맞는 회갑은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우리 형제들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하면서도 일가친지와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여 나름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오신 노고에 감사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집성촌의 씨족사회를 이루고 사는 마을에서 한 집안의 희로애락은 으레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한다. 마당에는 하늘을 가리는 천막을 치고 돼지 잡고 홍어에 막걸리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잔칫날에 지역마다 준비하는 음식이 다르겠지만 저자의 고장에서는 돼지고기, 홍어, 막걸리가 빠지면 제대로 된 잔치가 아니었다. 잔치를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항아리에 넣은 홍어를 짚과 소금을 넣고 삭힌다. 홍어에서는 암모니아가 발생하여 지린내가 나는데, 이 암모니아가 세균 번식을 막고 오래 둬도 살이 썩지 않도록 한다. 분홍빛 살점을 돼지 삼겹살과 함께 묵은 김치에 싸 먹으며 탁주를 곁들인 것이 홍탁삼합(洪濁三合)이다. 사람들은 콕 쏘는 듯한 냄새가 역겨워 코를 잡고서도 홍어를 먹는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회갑연과 관련된 세시풍속에 따르면 연회 도중에 장성한 자식들이 어린이와 같은 옷을 입고 환갑을 맞은 부모에게 재롱을 부린다고 하지만 형과 매형은 양복을 입었고 여자 형제들은 한복을 입고 저자는 검은색 동복을 입었다. 바로 위 중형은 5.18 항쟁 가담자로 수배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중형은 명절 등의 가족행사에 불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관할 경찰서의 담당 형사들이 수시로 집에 들러 부모님에게 "아들 왔어요?"라고 묻곤 하였다. 5.18 때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로서 활동했던 중형은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도피생활을 하다 30대가 다 되어 군대를 가는 등 시쳇말로 인생의 진로가 꼬였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축하연의 주인공인 아버지가 대취(大醉)하여 잔치 중간에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분 좋아서 한 잔, 축수를 기원하는 아들, 딸과 사위들이 건네주는 한 잔, 일가친지와 친구들이 건네주는 한 잔에 넉다운이 되고 말았다. 술이 센 선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천고마비의 10월 말의 날씨는 청명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고 너 나할 것 없이 한 곡조를 뽑았다. 아버지는 회갑연 이후 36년을 더 사시다 돌아가셨으니 꽤 장수의 축복을 누렸다 할 것이다. 그것도 병원 신세도 몇 개월밖에 지지 않으셨다.


요즘에는 회갑 잔치를 한다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한다. 대신 가족들이 모여 단출하게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평균 기대수명이 80세를 훌쩍 넘는 시대이다 보니 나이 60은 명함도 못 내미는 처지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60은 개인 생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육십 성상(星霜)이 지난 후에 자신이 태어난 해를 다시 맞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맞이를 육십 번 해야 한다. 환갑(還甲)은 육십갑자이면서 갑(甲)의 귀환(歸還)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에 따라서는 회갑의 의미를 '이제 한 살 먹었다'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인생은 60부터 라며 추켜세운다.   


저자도 금년에 갑(甲)이 귀환하는 해를 맞는다. 인생 마라톤 코스를 한 바퀴 돈 것이다. 마음은 아직도 코흘리개 적 동네 마을에서 친구들과 놀던 시절에 가있는데, 60이라는 숫자를 보고 나니 꽤 오래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40대 중반이었고, 저자의 부모님 세대 평균수명이 50대 중반이었음을 상기하면 괜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나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겠지만 저자의 형제와 자녀 그리고 지인들은 저자의 돌아온 갑이 어떤 모습으로 귀환했는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지금까지 저자를 지켜보고 내린 평가가 훨씬 더 객관적일 것이다. 사람이란 자신에 대해서는 점수가 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귀환하는 갑의 모습이 동그라미 형태였으면 한다. 반듯하게 네모진 것도 아니고 뾰족한 삼각형이 아니면 좋겠다. 동그라미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원만(圓滿)이다. 사전적 의미는 '성격이 모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너그럽다'이다. 70년대 국민가요가 되었던 '얼굴'의 첫 구절에 "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동그라미를 그리려다 자기 얼굴을 그렸거나 자신의 얼굴 모양이 동그랗다고 생각하여 그렸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네 얼굴 모양도 길쭉하게 생긴 둥근 모양이다. 저자의 귀환한 갑의 모습이 동그라미이길 바라는 것은 저자의 얼굴이 동그라미가 아니고 저자의 보이지 않은 내면의 세계가 동그라미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60 세월이라는 조각칼이 저자의 뾰족하고 각진 모양을 깎고 다듬어 동그란 모습을 만들었으면 한다. 동그라미는 겉모양이 모나지 않아서도 좋지만 무엇보다 만월(滿月)처럼 꽉 찬 느낌이 좋다. 저자도 동그라미의 특성처럼 살고 싶다. 모나지 않으면서 뭔가 속이 꽉 찬 사람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저자는 60대 선친과 지금의 나를 비교해본다. 비교 결과에 따르면 저자는 내면의 세계와 사회경제활동 측면의 외면 세계에서 선친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평을 한다. 저자와 선친과의 비교는 한 마디로 비교 불가다. 저자도 열심히 살아왔지만 선친에 비하면 그 양과 질에서 비교 불가다. 가족과 이웃, 그리고 지기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를 따져보아도 비교 불가다. 억지로라도 선친보다 잘하고 있다고 자평하고 싶은 것을 하나 꼽아보면 '자기 관리' 영역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 선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교만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선친은 구십 대에도 술로 인사불성이 되어 어머니와 자녀들의 걱정을 끼친 적이 꽤 되었지만, 저자는 40대 이후에는 적당량의 술을 마셨다. 그야말로 약주로서 마셨다. 선친은 타고난 건강체를 지녀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생활을 했지만, 저자는 약한 체질로 태어나 이를 보강하기 위해 부단하게 운동하면서 건강을 지켜나가고 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에 해로운 습관을 가지고 있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건강에 이로운 습관을 만들어가면서 개인의 평균수명이 비슷해지는 것 같다.


저자는 갑의 귀환을 계기 삼아, 다시 말해 또 다른 육십갑자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다섯 가지의 약속을 한다. 계로록(戒老錄), 즉 늙음을 경계하자는 약속이다.


첫째, 건강관리를 잘 하자.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몇 달 전 안면마비(구안와사)를 겪으면서 과로, 스트레스가 얼마나 내 몸에 치명적인가를 체험했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쓴 덕분에 안면을 가릴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일부러 마스크를 쓰면서 생활했어야 했을 것이다. 일상에서 임계치를 넘는 행동이나 생각을 경계하자. 지나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특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기대수명은 80세가 넘지만 평균 17년은 병원 신세를 진다는 통계가 있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건강은 우리 삶의 주춧돌이다.


둘째, 행동을 무겁게(조신하게) 하자. 물건을 집을 때는 반드시 양손으로 잡자. 한쪽 손에 뭔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일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가. 한 손은 불안하다. 흘리고 떨어뜨리기 일쑤다. 털썩 앉지도 급히 일어서지도 말자. 바쁜 일도 아닌데 잘못된 습관 때문에 척추와 관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음을 명심하자. 택배 물건을 열거나 접착제를 벗겨낼 때도 의자에 앉거나 무릎을 꿇은 안전한 자세로 하자. '이왕 죽을 목숨인데 왜 그리 서둘러 갈 필요가 없다'라는 선승의 말도 있잖는가.


셋째, 정리원융(情理圓融), 즉 감정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자. 인간의 감정을 상징하는 뜨거운 가슴도 이성을 나타내는 차가운 머리도 임계치를 넘어서까지 써보았다. 이제는 알 것 같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 생각, 관계가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가를 말이다. 고려대학교 철학과 김충렬 명예교수는 정리원융의 대가다. 그가 태어난 원주에는 그의 호를 딴 중천(中天) 시립도서관이 있을 정도다. 중천은 이렇게 말한다. "정(情)을 제켜놓고 인간문제를 논하는 것은 죽은 송장을 놓고 대화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이나 제도 심지어 예의와 법도 역시 정과 소통을 잘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정과 이의 조화를 꾀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은 일생에 걸쳐 마음에 새기며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넷째, 소식 소탐(小食小貪)을 하자. 나이가 먹을수록 위장 기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입에 적게 넣고 꼭꼭 씹어 소화를 잘 시키자. 식탐은 경계하고 또 경계하자. 소화되지 않은 잉여 음식은 내 몸에 독이 된다. 일도 음식과 같은 이치다. 하고 싶은 일도 적당량으로 줄이자. 원고 청탁이 들어와도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조절하자. 달리기도 지나치게 목표를 설정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달리자. 하고 싶다고 다 되지도 않지만, 괜한 욕심을 부리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탈이 생길 수 있음이다.


다섯째, 저자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 저자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한 경우도 한두 번 아니다. 욱하는 성질은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다. 저자 스스로 왜 욱하는가에 대해 분석해보았다.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점은 나 자신이 상대에 의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나 스스로 그렇게 예단을 하고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결과다. 진짜 자존감이 무엇인지 알 나이가 되었지 않는가. 내가 주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지 말자.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던가. 연구에 따르면 부신에서 나온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은 심장박동을 늘리고, 혈압을 높이고, 혈당치를 올리는 역할을 하는 데 사람이 화를 낼 때 이 두 호르몬이 증가한다. 두 호르몬은 분비된 뒤 효소에 순식간에 분해되어 10~20초 정도면 원래 수준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도 심호흡을 서너번하다 보면 호르몬이 줄어 화가 나지 않을 수 있다(나흥식, 2022). 속담이 빈 말이 아니다.


여섯째, 정신적, 정서적으로 늙지 말자. 신체는 누구나 늙게 되어 있다. 대자연의 순리를 운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정신적, 정서적으로 늙어버리는 것이다. 젊은이도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으면 이미 젊음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물며 신체적으로 노인인 사람이 정서까지 메말라 버리면 그야말로 완전 노인이 되고 많다. 간혹 지하철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노인을 보면 다시 보게 된다. 지적 호기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서적으로 풍성한 감성을 소유한 노인을 보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고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나도 그러고 싶다.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책을 놓지 않으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갖자.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1920~)는 인생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03세 철학자의 인생 조언이라 그런지 더 신뢰가 간다. 30세까지는 자기 계발을 하는 단계이고, 65세쯤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대학교수의 정년 65세를 기준으로 했지만, 개인의 직장 정년을 기준으로 해도 될 성싶다), 90세까지는 지식과 경험을 살려 사회를 위해 일하는 단계라고 한다. 노인의 유형을 늙은이, 어르신, 액티브 시니어, 선배 시민(senior citizen) 4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늙은이'는 생존 문제에 직면한다. 폐지를  주워 하루하루 연명하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된다. 'No人', 잉여인간, 이등국민 취급을 받는다. '어르신'은 지혜롭고 존경받는 현명한 존재다. 'Know 人'의 지위에 있다. 개인적으로 부담스러운 호칭이다. '액티브 시니어'는 취미와 여가를 즐기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성공한 노인이다. 경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선배 시민'은 시민권(citizenship)을 권리로 인식하고 공동체에서 이것을 함께 나누고 실천하는 노인이다(홍인철, 2022). 나이를 먹는 것과 삶의 지향점은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갑의 귀환을 맞은 저자의 삶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분명히 늙은이는 아니다. 어르신은 부담스럽다. 액티브 시니어와 선배 시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다시 시작하는 갑의 여정은 그런 방향으로 살 것이다. 조부와 선친을 보면 우리 집안은 장수 DNA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인생 3단계에 해당하는 30년은 액티브 시니어로 선배 시민으로 건강하고 활기차게 활동하면서 나 자신과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고 싶다. 갑의 귀환 기념으로 받은 동그라미 거울을 비춰보며 원만하고 의미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리원융의 철학을 잊지 말것이다.


소노 아야코. (2004).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계로록》. 오경순 옮김. 리수.

나흥식. (2022). 《조선일보》.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피하는 이유, 화낼 때 나오는 호르몬 20초 뒤 사라져〉. 8월 25일.

장세정. (2020).중앙일보》.〈100세 철학자 김형석 "살아보니 열매 맺는 60~90세 가장 소중"〉. 9월 28일.

홍인철. (2022).《연합뉴스》.〈[100세 인간] ③ "어떤 노인으로 살 것인가" … 4가지 노인의 유형〉. 8월 21일.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유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