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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Aug 30. 2022

여수, 다시 보기

beyond a harbor

70년대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지의 1순위는 여수 오동도였다. 내륙 지방인 화순 지역 초등학교에서는 바다가 있는 여수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여수는 오늘날처럼 역동적인 도시라기보다는 남쪽 바다의 자연풍경을 뽐내는 조용하고 정적인 항구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오동도가 가장 인기 있는 명승지였다. 부모님도 매년 여름철에는 해수욕장을 갔는데, 여수 만성리는 큰맘 먹고 가곤 했다. 보통은 보성 율포 해수욕장이나 외가가 있는 영광 가마미 해수욕장을 찾았다.


열대야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는 8월 어느 날 여수(麗水)를 찾았다. 해수욕장을 가는 대신 바다를 보러 여수를 행선지로 선택했다. 흔히 “여수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마라!”라고 하는 우스개로 여수를 '돈'과 연관 지어 말하곤 한다.  항구도시 여수에는  돈이 많고 벌교에는 운동 잘하는 사람이 많아 주먹 센 이가 많고, 순천에는 출중한 인물이 많다는 뜻이다.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분석을 내놓았다. “벌교는 오래전부터 보성과 순천, 승주와 고흥을 잇는 도로가 있었어요. 여기에다가 철도역이 있는 교통 요충지였어요. 지금은 약간 상황이 달라졌지만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역전에는 인근에서 ‘주먹’ 좀 쓴다는 왈패들이 모이잖아.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주먹싸움에서 거세게 저항하면서 벌교 사람들의 매서움이 알려졌지. 나중에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본과 일본인을 때려눕히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할 거예요.” “이에 비해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어. 얼굴 잘생기고 못생긴 것을 기준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을 거예요. 순천에는 오래전부터 고흥, 구례, 보성 등 전남 동부 6군의 인재들이 모였던 곳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인물은 바로 실력을 겸비한 ‘인물’을 말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여수’와 ‘돈’에 관한 설명이었다. “여수는 좀 더 명확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촌이 농촌이나 산촌보다는 잘 살 거예요. 배 한 척 있으면 예나 지금이나 부자이잖아.” (박종현, 2009). 저자는 어릴 적부터 여수, 순천, 벌교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인지 조정래의 분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만 항구를 낀 어촌이라면 우리나라에도 수십 곳이 해당하고 그 지역을 돈과 연관시키지는 않는데 여수는 좀 특별하다는 느낌이다.  


여수를 돈으로만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본다. 어쩌다 한때 그런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모든 여수시민들이 환영하는 평가는 아닐 것이다. 여수는 '돈'이라는 단일 요소를 대입시켜 평가, 해석하기에는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생태적 요소가 어우러진 항구 도시다. 사실 전라도에서 항구 하면 서해안의 목포 또는 군산을 생각하기 쉽다. 특히 목포는 서남부의 대표 항구 도시로서 1897년 개항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목포항과 호남선의 목포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하였다. 특히 一黑(김) ,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은 군산에서는 쌀을, 목포에서는 면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가수 이난영이 1942년 불러 잘 알려진 <목포는 항구다> 노래 또한 항구 하면 목포를 연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영화 <목포는 항구다>(2004년)는 노래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1923년 개항한 여수는 호남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 목포나 군산에 비해 도시 접근성, 인프라, 지역경제 등 여러 측면에서 뒤떨어졌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조성된 국가산업단지조성과 여수시의 엑스포 개최 등 관광자원 활성화 노력 덕분에 여수는 교통, 경제, 인프라, 접근성 등에서 목포와 군산을 앞질렀다. 지표가 말해준다. 2022년 7월 기준으로 여수 인구는 275,489명으로 목포 인구 217,470명보다 월등하게 많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지역 내 총생산(GRDP)에서도 여수는 25조 원이 넘는 규모였으며 목포는 4조 3천억 원 규모로 여수가 전남 총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다. 말이 씨가 되었다. 저자는 여수를 크게 두 가지 관점, 즉 여수의 역사문화적, 생태문화적 가치와 관련 지어 양파 껍질을 벗기듯 속을 파헤쳐 볼 생각이다.



먼저 역사문화적 측면에서 여수를 조명해보자. 여수를 생각하면 오동도(梧桐島)를 떠올린다. 섬 모양이 오동잎처럼 생겼다던가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오동도가 이름값을 하려면 오동나무가 많아야 하는데 그 많던 오동나무는 어디에 갔을까? 실제 오동도에 가서 오동나무를 찾기란 쉽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말 오동도에 오동 열매를 따 먹으러 봉황이 날아든다는 소문을 들은 공민왕이 오동도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명하였다고 한다(여수시 홈페이지). 봉황은 곧 상서로운 동물로 왕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오동도가 있는 터에서 왕이 태어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사한 전설이지만 고려 말 공민왕 때의 승려 신돈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의 멸망을 불길하게 예견하고 전라도 출신이 왕권을 잡을 것이라 하여 사람인(人) 자 밑에 임금 왕(王) 자를 쓰는 '전'자를 들입(入) 자 밑에 임금 왕(王) 자를 쓰는 '全'자로 쓰도록 하고,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도록 하였다고 한다(산림청 참조). 왕권이 탄탄하지 않거나 민심에서 멀어진 왕들은 구전되는 소문에 과잉반응을 하기 마련이다. 현대 민주국가의 최고 국가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동도에서 오동나무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오동도에서 진즉 관심을 끄는 것은 입구에 놓인 거북선 모형과 함께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새긴 돌비석이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호남과 국가의 존망이 어떻게 관련될까? 저자 역시 호남출신이지만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고 살았다. 어떤 맥락에서 저런 말이 나왔지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왕조시대에 이런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 역모죄로 몰고갈 수도 있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맥락을 쫓아가 보아야 한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는 말은 호남출신의 인사가 호남에 대한 애정을 담아 한 말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아니었다. 이순신의 말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 중인 1593년(선조 26년) 7월 16일 이순신이 사헌부 지평(정 5품의 관직으로 오늘날 감사원의 역할을 함)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전후 맥락은 이렇다. 같은 해 6월 29일 왜적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하고 육로와 해로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을 앞에 두고 해로를 막아 전라도로 향한 왜군의 진격을 막을 계책을 세웠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호남을 지키기 위해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서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의 전략적 가치를 조선의 명운을 좌우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왜적이 여수에 도달했을 때 막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유리한 한산도 부근에 매복하여 왜적을 소탕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종종 말이나 문장은 어느 한 곳의 내용만을 따서 이해하면 맥락 없이 해석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이 전라도에 주둔하지 않고 왜 경상수군 관할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여수는 전라좌수영의 본거지이자 삼도수군의 통제영이 설치된 지역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고 조선 수군의 훈련 및 병참기지였다. 여수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여수에는 이순신이나 거북선과 관련된 상징물이 많다. 이순신 대교, 거북선 대교, 진남관, 이순신 장군 자당 기거지, 시내 도처의 거북선 모형 등. 이순신의 어머니와 가솔들도 4년여 동안 여수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이순신 자당 기거지'는 역사유적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남도 지정문화재가 되었다(이경기, 2021).


현대사에서 여수는 1948년 여순 사건(麗順事件)과 관련된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 연대 군인 2,000여 명이 남로당 계열 군인들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2021년 정부는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의 제정 목적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 발생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인 여순 10·19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국민 화합의 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73년 만이다. 제주 4.3 사건(1947년), 노근리 사건(1950년), 거창 양민학살사건(1951년)의 경우에는 국가폭력으로 인정돼 이미 특별법이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늦어도 한참 늦었다. 과거사를 분명하게 밝혀내 진실되게 평가하는 것 역시 후대의 몫이다. 국민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게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지만, 설령 억울하게 희생된 일이 있었다면 진실을 밝히고 바로 잡는 것 역시 정부가 할 일이다.  


둘째는 여수의 생태문화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수(麗水)는 한자식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곱고 아름다운 천혜의 미항(美港)이다. 한국의 나폴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2012년에는 '여수세계해양박람회(Expo 2012)'가 열려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도시가 유명해지려면 볼거리 못지 않게 먹거리가 풍부해야 한다. 저자의 경우 여수에 가서 제일 먼저 찾는 것은 게장이다. 게장은 밥도둑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별미 중에 별미다. 게장은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얼큰한 양념게장을 더 좋아한다. 여수 봉산동에는 '봉산게장거리'가 있다. 또 여수 하면 돌산갓을 빼놓을 수 없다. 돌산읍에 가면 밭이 온통 갓으로 뒤덮여 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밭으로 생각했다. 갓은 겨자나 고추냉이와 같은 겨자과의 식물인데 남쪽 바다의 해풍을 맞고 자란 여수 갓은 특유의 향이 일품이다. 영화 <택시운전사>(2017년)에서도 갓김치가 등장하는데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는 외국인도 혼쭐난 장면이 나온다.


저자는 이번 여수 여행에서 오동도를 새롭게 볼 기회를 가졌다. 오동도가 생태문화적으로 그렇게 빼어난 곳인 줄 미처 몰랐다.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에서 보았던 오동도의 모습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동도에는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었는데 유달리 후박나무가 많았다. 후박나무의 목재는 도장재료로 쓰이는데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상당수가 후박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후박나무의 껍질이 위장을 따뜻하게 하여 장의 기능을 좋게 하고, 설사와 이질이나 구역질을 낫게 하는 대표적인 위장병 약재로 기록하고 있다. 잇몸 질환에도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박(厚朴)하다'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박나무는 '후박'하다는 나무 이름처럼 자라는데 까다롭지 않고, 나무의 바깥 모양이 너그럽고 편안하게 보여 옛 시골의 후박한 인심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박상진, 2011). 사람에게 베푸는 혜택도 후박하다. 후박나무 군락지에서 태어나 자라고 후박나무 때문에 공부하고 병을 고치고 가정경제를 일으켰던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 지인은 신안군 가거도 출신인데 어릴 적 용돈이나 학용품 대금, 학비 대신 후박나무 껍질, 즉 후박피(皮)를 받았다고 한다. 후박피를 가지고 목포시내 한약방에서 높은 가격의 현금과 교환하였다고 한다. 이런 것을 환금성이 뛰어나다고 하던가. 후박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지인의 얼굴에서 후박나무에 대한 자긍심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가거도산 후박피는 최상품으로 한약재료로 귀하게 평가받고 있다. 하기야 저자도 어릴 적 장날에 보리나 쌀을 가지고 다른 물건을 사 가지고 온 적이 많았다.  


지인이 말하는 가거도와 후박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거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가거도(可居島)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는 섬으로 이름 그대로 '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거도는 단순한 섬이 아닌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다. 요충지로서 가거도는 기상 악화 때 어선이 긴급대피하고 동중국해를 오가는 어선의 보급기지 역할을 담당한다. 중국과 얼마나 가까운지 "중국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최경호, 2022). 그런 가거도는 400여 명의 주민이 주인이 아니라 후박나무라고 말할 정도로 후박나무 군락이 많다고 한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양의 70%가 가거도에서 생산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송아지도 후박나무 열매를 좋아한다고 한다. 가거도에는 독실산(犢實山)이 있는데 이는 송아지가 먹는 열매, 즉 후박나무 열매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 후박나무가 오동도에도 군락을 이루고 서식하고 있었다. 후박나무는 변산반도가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오동도에서 후박나무를 보는 순간 저자의 마음은 가거도로 가있었고 송아지들이 독실산에서 열매를 먹는 그림이 그려졌다.


여수는 오늘날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떠올랐고 역사, 생태, 문화적 콘텐츠 풍부한 미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인 정현종은 <섬>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문학평론가 김남호는 이 시에서의 ‘섬’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로서의 ‘섬’이다. 이때의 섬은 현대인의 단절된 인간관계의 복원을 염원하는 상징적 기호이기도 하다. ‘그 섬’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그런 관계의 회복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다락방’ 같은 고독한 공간으로서의 ‘섬’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부대끼다 보면 인간에 대한 염증이 짙어져서 무인도 같은 치유의 공간으로서 ‘섬’이다(김남호, 2021). 시의 위대성이다. 17자로 된 시어(詩語)에 함축된 메타포가 얼마나 강렬한가. 끊어지고 단절된 인간관계를 다시 찾고자 할 때나 지치고 힘들어 몸도 마음도 가누기 어려울 때는 여수에 가보자. 그곳에는 치유의 공간이자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항구와 섬들이 있다. 버스커 버스커가 부른 발라드풍의 노래 <여수 밤바다>에는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수는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이 있고 전라좌수영에서는 이순신과 수군들의 기합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생태문화적으로도 풍부한 콘텐츠를 보유한 항구도시다. 오늘날 여수는 항구 이상의 그 무엇이다. 물론 전해오는 옛말처럼 여수에서 '돈'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박상진. (2011). 우리 나무의 세계 2. 김영사

정현종. (2009). 《정현종 시선집》. 열림원.

김남호. (2021). 《경남일보》. 〈[작가칼럼] 그 섬에 가고 싶다〉. 8월 5일.

김아름. (2021). 《생명의 숲》. 〈자생식물 가득한 원시의 맛, 신안 가거도 독실산 난대수림〉. 2월 23일.

박종현. (2009). 《세계일보》.〈“‘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 어디에서 나왔나요?”〉. 8월 25일.

이경기. (2021). 《전남일보》.〈 여수 오충사‧이순신 모친 거처, 전남도 지정문화재 됐다〉. 8월 8일.

최경호. (2022). 《중앙일보》.〈'2,300억' 가거도 수퍼 방파제〉. 9월 8일.

〈갓김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여수 오동도의 활엽수림. 《산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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