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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09. 2022

무등산 평전

지극히 덕이 높은 산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장성을 지나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할 때면 정면 시야에 펀펀하게 좌우로 퍼져있는 웅장한 산이 눈에 들어온다. 무등산(無等山)이다. 무등산은 두팔을 크게 벌려 광주로 오는 사람을 맞이한다. 그것도 사시사철 다른 색으로 치장을 하고서 말이다. 무등산은 사람만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를 품고 있다. 저자는 그런 무등산(1,187m)을 2020년 4월 18일 처음으로 등정했다. 2013년 3월 4일, 무등산이 21번째로 국립공원이 되고 7년이 지난 뒤였고 생애로는 58년만이었다. 1,000m가 넘는 정도의  산에 오른 것을 '등정'이라고 표현한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자에게 무등산 등정은 유별난 감회를 선사했다. 저자는 광주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쳤지만 중요한 뭔가를 빠트리고 산다는 허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등산을 가보지 않고 광주와 호남에 대해 말하는 저자 자신이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본질을 모르고 산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타향에 살다 보면 고향 이야기를 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으레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무등산에 가보았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직 가보지 않았다고 말할 때는 내심 부끄럽기까지 했다.


무등산에 가보지 않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광주에 살아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겐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승용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세 개의 큰 산이 보인다. 무등산, 지리산, 월출산이다. 어느 날 화순과 담양 지역을 여행하는 데 하루 종일 무등산 일대를 빙빙 돌았던 기억도 있다. 무등산의 지리적 존재는 넓다. 광주, 화순, 동복, 창평, 담양, 능주, 남평, 나주에 걸쳐 있다. 지리산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 있는 거산(巨山)이라면 월출산은 영암과 강진으로 통하는 바위산으로 마치 병풍처럼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과 월출산이 외곽에서 전남을 보호하는 수문장과 같은 형상이라면 무등산은 광주와 전남 일부 지역을 품어 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광주의 어머니산으로 부르는 이유다.


무등산은 바라보는 각도와 계절에 따라 다양한 자태를 드러낸다. 한 겨울 안개낀 아침 무등산 팔각정에서 바라보면 마치 양파와 같다. 첩첩의 낮은 산들을 덮은 안개가 걷히면서 그 신비한 자태를 조금씩 내비친다. 내 고향 화순에서 바라보면 무등산은 어느새 커다란 원반 모양으로 바뀐다. 담양 추월산쪽에서 바라보면 말 안장이 되어 금세 달려나갈 것 같다. 폭설이 내린 날에는 하얀 망토에 중절모를 쓴 거인을 연상한다. 장성쪽에서 보면 어린왕자에서 보아뱀을 삼킨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 담양쪽에서 보면 어머니가 편안하게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모습이다. 멋과 맛에 무등산을 바라보고 가고 또 가는 것 같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호남 5대 명산에 무등산이 빠져있다. 5대 명산 중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이 포함된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여기에 장흥 천관산과 부안의 능가산이 포함된 것은 의외라고 생각한다. 호남 5대 명산의 유래는 조선 성종 때 문인 성임(1421-1484)이 내장산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 <정혜루기(定慧樓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정혜루는 내장산 내장사 앞에 있는 누각 이름이다. "호남에 이름난 산이 많은데, 남원에는 지리산, 영암에는 월출산, 장흥에는 천관산, 부안에는 능가산(변산)이 있으며, 정읍의 내장산도 그중의 하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내용을 조선 중종 때 완성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대로 인용하면서 호남의 5대 명산이라 불리게 됐다(2020, 박정원). 인물 족보도 그렇지만 산 족보도 처음 누가 기록하여 남기는가에 따라 그대로 전승되는 것이다. 성임이 무등산에 왔다 갔다면 분명 그 평가를 달리 했을 것이니라.


무등산은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한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등산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지만 ‘무돌’, 즉 ‘무지개를 뿜는 돌’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의 서석(瑞石)은 ‘무돌’의 한자식 표기라는 이야기다(김종구, 2012). 무등의 이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많은 설이 있다고 하지만, 저자는 무등산의 의미를 한자 의미대로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산(無等)’으로 이해하고 싶다. 온갖 차별과 불평등으로 굴곡진 세상에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주는 그런 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면 금세 차별 없는 따뜻한 세상이 될 것만 같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산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껴안고 있는 산은 무등산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면서 무등산의 차별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무등산의 이름과 관련지어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옛날에는 무등산을 서석산(瑞石山)으로 불렀고 무정산으로도 불렀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왕권을 차지할 마음으로 전국의 영산(靈山)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했는데, 무등산이 반대하는 바람에 이성계가 ‘무정(無情)’하다고 생각하여 무정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산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과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산의 정기를 받으면서 살고 그 산을 닮아 가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불의에 저항하고 대의를 위해 행동하는 광주를 의향(義鄕)으로 부르는 것은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갈망하는 무등의 정기를 이어받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광주의 주산이자 진산(鎭山)인 무등산을 직접 밟아보고 그 진면목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저자는 증심사-중머리재-중봉-서석대-입석대-장불재-증심사 코스로 다녀왔다. 4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무등산은 광주를 통해서만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 고향 화순 만연산(668m) 정상에서도 능선을 따라 무등산에 갈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지리산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포함하는 것처럼 무등산도 광주와 화순을 아우르고 있다. 화순에서도 무등산을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무등산은 지리산 마냥 높거나 월출산처럼 기암괴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압감을 줄 정도의 산세도 아니다. 서석대, 입석대, 광석대(규봉 주상절리)로 불리는 주상절리(기둥모양 갈라짐)의 위용에는 압도될 수 밖에 없다(광석대는 규봉암에 있는데 '규봉'은 선친의 이름과 같아 친근감이 들었다). 절리들은 군락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서있었는데 무려 8,700만년 전 용암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평평한 산세에 한결같이 단아하고 일정한 크기의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다. 수백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 요즘식으로 말하면 타운하우스 단지와 같은 느낌이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하늘을 향해 버티다 힘에 부치면 땅으로 떨어져 산화할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는 법이다. 제주 바닷가의 주상절리가 안정감 있게 느껴지는데 반해 무등산의 주상절리는 웅장하고 고고한 자태를 발산하지만 땅위에 마치 물구나무를 서있는 것처럼 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무등산 등정을 마치고 나서야 광주와 화순에 대해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소재 학교의 교가 첫 구절에 무등이나 무등산이 등장하는가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산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기분이 얼마나 상쾌한지 몸은 무겁고 다리 관절은 삐근거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야 무등의 정기를 받은 호남의 아들이 된 기분이었다. 81년 광주를 떠나 서울 생활을 하면서 북한산(해발 836.5m)이 가장 높고 수려한 산으로 알고 살았다. 육신의 어머니를 떠나보낸 저자에게 무등산은 자애로운 어머니로 다가왔다. 틈나는 대로 무등의 편안한 품에 안길 것이다. 무등산 등반으로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들을 등산하고 싶다.


무등산과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다산은 열일곱 살 때 화순 현감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화순 동림사(東林寺)에서 공부에 정진하면서 무등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다산이 무등산에 가게 된 연유가 재밌다. 다산이 화순 적벽을 다녀온 뒤 과거시험에 합격한 화순 사람 조익현(曺翊鉉)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다산에게 무등산 등반을 권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다.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은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가슴속의 회포를 열고 기지(氣志)를 펼 수는 없는 법이다.” 누가보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기개가 컸던 다산이 가만 있을리 없었을 것이다. 다산은 무등산을 다녀와 '무등산에 올라(登瑞石山)'을 남겼다(김종구, 2012). 시의 앞 구절을 음미해보자.


무등산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

산꼭대기 험준한 곳엔 해묵은 눈이 있다.

태곳적의 모습을 고치지 않아

본모습으로 쌓여 있어 의연하구나

여러 산들 모두 섬세하고 정교하여

깎고 새긴 듯 뼈마디 드러났네

오르려 할 때는 길도 없어 멀고 멀더니

멀리 걸어오니 낮게 느껴지네

모난 행실 쉽게 노출되지만

지극한 덕 덮이어 분별하기 어렵네...(박석무, 2014: 109).


"지극한 덕 덮이어 분별하기 어렵네." 다산의 눈에 무등산은 덕(德)으로 덮인 태곳적 산으로 보였다. 이 표현은 높은 경지의 산이라서 어떻게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무등의 원래 뜻을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다. 십대의 다산이 지은 무등산에 대한 시는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광주 출신 이성부(1942~2012) 시 '무등산'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콧대가 높지 않고 키가 크지 않아도

자존심이 강한 산이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그냥 밋밋하게 뻗어 있는 능선이,

너무 넉넉한 팔로 광주를 그 품에 안고 있어...


저자가 무등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시다. 무등산에 올라 느끼는 것은 밋밋하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연결된 산이라는 것이다. 밋밋하지만 넉넉하다. 그 밋밋하고 넉넉한 팔로 광주를 품에 안고 있다. 무등산이 광주를 품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광주가 무등산에 안긴 모습이 더 맞을지 모른다. 고산준령으로 콧대가 높고 키가 큰 산은 아니지만 자존감이 강한 산이라는 표현에는 무릎을 친다. 그 자존감이 오늘의 광주를 예향(藝鄕)을 넘어 의향으로 부르게 만든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박석무. (2014). 정약용 평전. 민음사.

이성부. (1977). 백제행. 창작과 비평사.

김종구. (2012). 한겨레. [유레카] 무등산. 12월 30일.

박정원. (2020). 월간산. [5월의 명산ㅣ장흥 천관산] 진달래 명산에 호남 5대 명산. 4월 29일.

무등산웹생태박물관. http://mountain.witches.co.kr/sub.html?pid=20&code=295 

<조익현>. 디지철화순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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