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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16. 2022

엘리자베스 2세

유산과 리더십의 교훈

프로 골퍼 박세리, 프로 야구선수 박찬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세 가지 공통점은? 한때 유행하였던 유머다. 첫째는 세 사람 모두 '공주' 출신이다. 박세리와 박찬호는 지역적으로 충남 공주 출신이고, 엘리자베스 2세는 여왕에 즉위하기 전의 신분이 공주였다. 두 번째의 공통점은 모두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이다. 박찬호와 박세리는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탄탄한 근육의 하체를 갖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여왕은 어떨까? 여왕도 다리가 튼튼하여 몇 시간이고 선채로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는 세 사람 모두 모자를 즐겨 썼다는 점이다. 그럴듯한 유머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 소식을 듣고 그가 남긴 유산과 리더십의 교훈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지난 유머를 꺼냈다.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2022)는 영국의 여왕(재위 1952~2022)으로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과 기타 국외 영토와 보호령의 군주를 지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이며, 공식 호칭은 영국 연방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이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증조모, 메리는 조모의 이름에서 따왔다.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70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와 다스리는 영역은 다르지만, 국가를 승계했다는 점에서 2세라 불렀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는 'z' 대신 's'를 써서 Elisabeth로 표기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입헌군주제의 군주로서 70년 동안 영국과 연방에 군림했다(현재영국 지배를 받았던 56개국의 연방 중 15개국가가 영국 군주를 자국 국가원수로 모시는 연방왕국이다)에 군림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통치 기간 72년보다 불과 2년이 부족하다. 루이 14세는 5세부터 왕위에 앉았다는 점에서 26세에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에 더 무게감을 느끼는 것은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타이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재위 1946~2016)도 70년을 통치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고구려 20대 장수왕(재위 412~491)이 79년으로 역대 최장기 군주로 기록되고 있으며, 조선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는 54년 동안 권좌에 앉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의 역사를 지닌 중국의 역대 왕 중에서도 60년 이상 권좌를 지킨 왕은 고작 2명에 불과하다(강헌, 2022).


한 나라의 군주가 얼마나 오랫 동안 권좌에 앉아있었느냐 보다는 그가 재위할 때의 시대적 가치와 도전은 무엇이었고 그는 군주의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치세 동안 영국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영연방의 해체 위기, 냉전, IMF 구제금융, 군주제와 왕실의 위상 추락 등 숱한 위기와 도전에 직면했다. 여왕은 영국 근현대사의 숱한 영욕(榮辱)을 겪으면서도 왕실의 권위를 지키면서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왕 재위 기간에 영국 총리 15명이 교체되었다고 하니 영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영국의 정치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입헌군주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절대왕정, 대헌장(마그나카르타), 권리청원,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등 일련의 정치과정을 거쳐 완성된 오랜 역사적 결과물이다. 시민계급은 영국의 정치과정에서 중요한 시점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상인과 제조업자 등의 시민계급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봉건제와 절대 왕정을 반대했다. 그들은 시민 중심의 시민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산업혁명 이후 시민계급은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게 되고 산업자본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영국은 일찍이 시민계급의 형성으로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행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절대왕정시대에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신봉했다. 왕의 권력은 신이 내린다라는 것이다. 대관식의 하일라이프는 켄터베리 대주교가 즉위한 왕에게 성유(聖油)를 바르는 도유식(塗油式)을 거행하는 장면이다. 대주교는 왕의 머리, 가슴, 손에 십자가 모양으로 성유를 바른다. 도유식이란 신성한 힘을 주입하는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유를 바른 왕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국가를 통치한다는 의미다. 왕좌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신을 대신하는 왕의 말은 곧 법이 되는 것이다. 왕권신수설은 절대군주제의 토대가 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일찍 의회 정치가 발전했다. 1215년 귀족들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며 “국민의 대표인 의회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대헌장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왕이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역사가들은 대헌장을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대헌장 채택 이후 의회와의 약속을 지키는 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왕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다시 꺼내 들면서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세금을 부과하는 등 대헌장을 위반했다. 의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의회는 “의회의 승인 없이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고, 법에 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체포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왕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권리청원(1628년)이다. 찰스 1세는 의회의 기세에 눌러 억지로 권리청원에 서명했지만 1년 후 의회를 강제로 해산했다. 이후 의회를 지지하는 의회파와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로 나뉘어 권력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영국사의 내전이었고 의회민주주의로 가는 데 중요한 길목이었다. 시민 계급과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왕당파를 제압하였다. 시민혁명으로서 청교도 혁명(1642년)이다. 


이때 등장한 희대의 혁명가가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다. 9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권력을 잡은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영국연방공화국(1649~1660)이다. 영국은 유혈 내전을 치루면서 전체 인구 650만명 중 3%가 넘는 거의 20만명이 죽었다(권석하, 2020).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크롬웰은 군주 이상의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영국을 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항해법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지만 민심을 얻는 데 실패했다. 크롬웰이 죽자 영국인들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영국인들은 독재에 대한 불만과 공화정에 대한 회의(懷疑)를 가졌다. 시민혁명으로 공화정을 만들었던 영국이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좋은 역사는 반복되지 않고 나쁜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더 많다. 


왕정으로 복귀한 뒤 왕들이 의회를 무시하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의회는 제임스 2세를 쫓아내고 네덜란드에 살던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 메리와 윌리엄 3세는 “의회가 법을 만들고 세금을 부과하는 등 의회의 권리를 모두 인정한다”라는 내용의 권리장전(1689년)에 서명했다. 공동 왕 추대 과정에서 제임스 2세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도주하게 되면서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무혈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되었다. 이 말을 의역하면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된다. 권리장전은 영국 의회정치 확립의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국왕과 의회가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제로 가는 합의였다. 이를 계기로 왕은 존재하지만 실제 통치는 의회가 하고 왕의 권력을 법적으로 제한하였다. 


드라마〈더 크라운〉(2016년)을 보면 입헌군주제를 묘사하는 짧은 대사가 나온다. 조지 6세는 1951년 윈스턴 처칠(재임 1940~1945/ 1951~1955)이  총리로 재선되어 버킹엄 궁전을 방문했을 때, 축하 인사와 함께 이런 말을 건넨다. "내가 얼마나 기쁜지 얘기하면 엄청난 위헌이 되는 건가?" 국왕에게는 엄격한 정치적 중립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왕이 정치적 표현을 하는 것은 곧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므로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에는 패션을 통해 정치적인 표현을 대신했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4월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이 영국을 처음 국빈 방문했을 때, 여왕은 녹색 에머랄드가 박힌 왕관과 목걸이를 착용했다. 녹색은 아일랜드 국가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포용과 통합의 메시지를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염철현, 2021). 여왕 2017년 파란색 정장과 모자를 쓰고 의회 개원 연설 단상에 섰을 때, 사람들은 파란 바탕 속 모자 장식이 유럽연합 깃발을 연상하면서 '여왕이 브렉시트에 반대한다'라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여왕이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파란색 재킷과 모자, 브로치를 착용했다. 이 브로치는 트럼프 전임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마바 부부가 선물한 것으로, 사람들은 '트럼프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으로 분석했다(이혜운, 2022). 


영국사를 살펴보면 오랜 기간에 걸쳐 국왕 중심의 왕당파와 의회 중심의 의회파가 권력을 놓고 유협 참극을 벌이는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을 보였지만, 결국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의회가 통치권을 장악하는 절충안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국가를 경영하도록 하고 국왕은 군림만 하는 새로운 세력균형을 이뤄냈다. 오늘날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통치체제가 아니라 대헌장, 청교도혁명, 명예혁명을 거치는 대장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일찍 통치체제와 권력 균형을 이룬 덕분에 영국은 세계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레이, 2022). 2022년 9월 8일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는 전임 국왕들처럼 입헌군주제의 취지를 존중하면서 영국과 연연방의 구심점으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여왕이 지난 70년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입헌군주제의 기본 원리를 견지하면서 국왕으로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받은 엘리자베스 2세가 남긴 유산과 리더십의 교훈을 네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졌다. 공주 시절 엘리자베스는 미래의 남편이 된 필립(1921~2021)에게 어렷을 적부터 푹 빠져들었던 것 같다. 필립은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이돌이었다. 필립은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금발에 다부진 체구를 지녔다. 영국인들은 필립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다. 필립은 몰락한 그리스 왕실의 왕자였지만 양차 대전으로 영국과 원수지간이 된 독일인의 혈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 필립의 누이 3명은 독일 왕족과 결혼하여 독일에서 살고 있었다. 필립은 20살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녀는 부모와 상의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했다. 왕실에서는 결코 생각하기 어려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아버지 조지 6세(재위 1936~ 1952)는 이듬해 4월 그녀가 스물한 살 생일이 될 때까지 비밀로 한다는 조건하에 동의했다(스미스, 2013: 46-67). 


필립은 직설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여왕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에 대해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조지 6세(영화〈킹스 스피치에서는 말을 더듬는 장애를 가진 조지 6세가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대중 앞에서 성공적인 연설을 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가 폐암 수술 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1952년 엘리자베스 공주는 부왕을 대신하여 영연방을 순회하게 되었을 때, 필립은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공주 옆에서 그저 원숭이처럼 히죽거리는거야." 조지 6세는 그런 사위에게 조용히 조언했다. "자네의 역할은 공주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애국이라네." 1953년 6월 여왕 대관식에서 필립은 아내이자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자신은 아내와 결혼했지 여왕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남성중심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젊은 남자가 아무리 아내이면서 여왕이라고 할지라도 평생 외조만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필립공은 내면의 갈등을 잘 극복하고 70년 넘게 여왕의 곁을 지키며 의무를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리스 왕실의 몰락을 목격한 탓에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영국 왕실의 현대화를 위해서도 애썼다. 여왕의 대관식을 텔레비전으로 생방송한 것도 필립의 아이디어였다. 무수한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2017년 한 행사에 참석한 필립공은 자신을 두고 "여러분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현판 제막 기계(plaque-unveiler)를 보게 될 것"이라는 농담을 남겼다(정은혜, 2021). 


젊은 시절 여왕과 필립공도 부부싸움을 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하지만  여왕 부부도 칼로 물베기를 꽤 했나보다. 필립공도 여왕에게 마음고생을 꽤 시켰다. 해외 순방 중 방송국에서 여왕 부부의 일상에 대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집안에서의 말다툼이 집밖으로 확대되었다. 고성이 오가고 물컵을 던지기까지 했다. 고스란히 필름에 담겼다. 여왕은 촬영담당자를 찾아가 "부부 사이에는 늘 있는 일이죠. 미안합니다. 필름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담당자는 당혹해하다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라고 전해주었다. 한번은 부부싸움을 한 끝에 여왕이 남편에게 화해를 청하기 위해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시오?" 필립공이 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에요." 필립공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여왕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필립공이 물었다. "엘리자베스예요." 이번에도 필립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왕은 무언가 생각을 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필립공이 물었다. "당신 아내예요." 그제야 필립공은 문을 열고 엘리자베스를 안아주었다. 집안에서 부부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존재여야 한다는 메시지다. 


여왕은 1999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안동 하회마을에서 73세 생일상을 받았다. 여왕은 풍산 류씨 문중의 고택 충효당을 방문했을 때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등 한국의 예법을 존중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남의 집 방안을 들어갈 때는 당연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지만 문화가 다른 유럽의 군주가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여왕이라도 타문화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런 문화와 의식 때문에 방문지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에 왕위를 승계했는데 16개월이 지난 1953년 6월에 대관식이 열렸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 총리는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두 번째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보수당 내부에서 사임 압력을 받고 있었다. 여왕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총리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영국을 구한 처칠이 위기에 처하자 대관식을 미루면서까지 그를 지원했다. 반대파들도 대관식을 준비하는 총리를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둘째, 개방적이고 탈권위적인 리더십으로 영국과 영연방의 구심점이 되었다.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reign but not rule)'라는 입헌군주제의 작동원리에 따라 현실 정치에 직접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1953년 6월 2일 여왕이 즉위(부왕 조지 6세는 1952년 2월 6일 서거했지만, 여왕 즉위식은 1년 3개월여만에 거행됨)하고 5년이 지난 성탄절에 행한 여왕의 연설은 그가 입헌군주제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옛날엔 군주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섰다. 리더십은 비밀스러우면서도 사적이었다. 나는 여러분을 전쟁으로 이끌 수 없다. 법률을 줄 수도, 집행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난 다른 걸 할 수 있다. 내 마음과 헌신은 이 오래된 섬(영국)에 바칠 수 있다."(고정애, 2022) 여왕은 입헌군주제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군주제가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왕실 가족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가 21살 생일이 되던 1947년 4월 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행한 연설, 즉 "나의 앞으로의 생애가 길건 짧건 간에 나는 여러분과 또 우리 모두가 속하는 제국의 가족들을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라는 선서를 지키는데 노력했다(스미스, 2013: 60).


여왕은 무엇보다 국익을 위해서는 군주의 존엄과 권위를 과감히 내려놓을 줄도 알았다. 1960년대 영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1909~1972)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아프리카'를 주장하며 소련에 기울어졌다. 영국은 아프리카 영연방국가들이 연방에서 탈퇴 또는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왕은 테러 우려와 영국 의회의 반대에도 가나를 방문하고 은크루마 대통령에게 춤을 먼저 제안했다. 군주인 백인 여성과 탈식민지 운동을 주도한 흑인 남성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은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외신들은 "여왕의 춤이 아프리카를 홀렸다"라고 보도했다. 1945년 여왕의 부친이었던 부왕 조지 6세가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국왕은 백인하고만 악수를 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백인은 흑인을 보균자로 간주하고 피부를 접촉하면 병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여왕의 개방적이고 탈권위적인 행보 덕분에 소련으로 기울던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을 연방에 잔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선우정, 2022). 2011년 여왕은 아일랜드를 방문했는데 아일랜드가 독립한 뒤 양국 간 깊은 갈등을 씻어내는 화해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BBC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에 빗대 “여왕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두 나라의 역사에는 위대한 순간”이라고 찬사를 보냈다(홍정수・조은아, 2022). 군주로서 여왕은 영국과 연방의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고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접합제로서 역할을 했다(채인택, 2022). 여왕에게는 영국과 영연방이라는 두 가족이 있었다. 영국과 영연방. 여왕을 두 가족을 돌보면서 가족 간의 화합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


셋째, 왕실 가족의 비리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여왕은 3남 1녀를 두었다. 찰스 3세, 앤 공주, 앤드루, 에드워드. 2019년 차남 앤드루 왕자가 미성년자 성매매 의혹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여왕은 그의 왕실 직함(전하)을 박탈하고 왕실의 일체 후원을 끊으며 왕실의 모든 생활에서 그를 배제시켰다. 여왕은 왕실 구성원의 비행과 비리에 대해 단호했다. 입헌군주제에서는 여왕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눈치를 볼 수 없다. 여왕은 시대변화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왕실의 운영을 살얼음을 걷듯 조심조심했으며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통합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남양주에 기거할 때 사용한 호 여유당(與猶堂)을 생각나게 한다. '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 왕실의 재정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왕실 가족의 일탈은 자칫 거센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 역사가 증거하고 있지 않던가. 군주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재정 운영은 영국 재무부가 지급하는 교부금으로 이뤄지는데 재정 규모는 얼마나 될까? 2021~2022 회계연도 왕실 교부금은 약 8,600만 파운드(약 1,380억 원)에 이른다. 2021년 기준으로 영국 왕실 소유 총자산은 약 280억 달러(약 39조 원) 정도로 추정된다. 법에 따라 국왕과 그 승계자는 상속세를 면제받는다.  


넷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전통적으로 영국 왕실의 남자는 거의 전원이 군 복무를 했다. 여왕도 공주 시절이던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 예비 국토방위단에 소위로 임관해 운전병 및 차량 정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여왕의 남편 필립공은 해군대학을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 중 시실리 상륙 작전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한 뒤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아르헨티나와의 포틀랜드 전쟁(1982년 4월 2일~1982년 6월 14일)에서는 당시 왕위 계승 2인자였던 앤드류 왕자가 영국 해군의 항공모함 인빈시블호의 헬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대처 수상이 앤드류를 후방의 행정요원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여왕이 반대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 사이에 태어난 여왕의 손자 해리 왕자는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장교가 된 뒤 주로 공격용 헬기 근무자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탈레반이 공개적으로 해리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새 국왕 찰스 3세가 왕세자로 임명한윌리엄은 2006년부터 2013년까지 군 복무를 했는데, 공군의 구조 헬기 조종사 등으로 150회가 넘는 수색과 구조 작전에 투입됐다(김나영, 2022).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도 왕자 시절에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1916년에 있었던 유틀란트 해전에 함포 담당으로 참전하였다(윤상용, 2014). 영국의 입헌군주제가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국난을 당할 때마다 왕실 가족이 솔선수범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왕 자신부터 국가에 대한 의무를 우선하였다. 자녀와 손자들까지 전쟁터로 참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왕도 군주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시행착오를 겪었고 상황을 오판한 경우도 있다. 여왕은 1966년 10월 20일 웨일스 애버밴의 탄광촌에서 발생한 매몰 참사 현장을 빨리 방문하지 않고 늑장 대응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150m 높이로 쌍여있던 2백만 톤의 석탄폐기물이 이례적인 폭우로 무너지면서 아래에 있던 학교와 인근 주택들을 덮쳤다. 144명이 사망했는데 아이들이 116명이나 되었다. 정부와 참모들은 여왕에게 참사 현장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여왕은 군주는 사고현장이 아니라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차일피일하였다. 군주가 현장에 가게되면 일하는 사람을 방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여왕은 참사에 무관심하고 무신경하다는 빗발치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현장을 방문했다. 


1997년 다이애나(1961~1997)가 찰스 왕세자와 이혼(1996년)한 뒤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왕실에서는 그녀가 더 이상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기를 내걸지도 왕실 입장을 내지도 않았다. 많은 영국인들은 군주제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대응에 왕실에 등을 돌렸다(고정애, 2022). 죽음 앞에 왕후장상이 따로 있을까. 왕족이든 그렇지 않든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연민을 실천해야 하는 평범한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왕은 이 두 사건에서 깊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많은 국가들이 영국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영국과 연방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의아해할 것이다. 영국은 56개 연방국(The Commonwealth)으로 이뤄졌는데 14개 나라는 영국 국왕을 자국의 왕으로 섬기고 있다. 이러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몇몇 나라 국민은 영국 국왕의 얼굴이 실린 지폐를 사용한다. 식민지 한국이 식민지배국가 일본을 생각하면 이를 갈 정도다. 생각하기도 싫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면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많은 식민국가들이 영국 연방으로 남아있다. 영연방국에 부여된 무역, 이주, 노동 분야에서 특권 때문에 연방의 일원이 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특혜는 1973년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면서 폐지되었다. 영연방의 구심점으로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었다면 영연방은 해체의 수순을 밟았을 거라는 예측을 하는 이유다(선우정, 2022). 실제, 여왕의 계승자인 찰스 3세가 영국 국왕이 즉위하면서 영연방 국가들의 이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영연방의 핵심 국가인 호주는 기존 5달러 지폐에 그려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 대신 호주 원주민의 예술 작품으로 교체한다고 한다. 왕위 계승자인 찰스 3세로 교체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는 조치였다. 현재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가 공화정 전환을 통해 연방에서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고, 말레이시아에서도 탈퇴를 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김지원, 2023). 


여왕은 입헌군주제에서 절대 권력은 내려놓았지만 국민으로부터 권위와 신뢰를 얻었다. 〈더 크라운〉에서는 입헌군주제에서 세습직 군주와 선출직 정부와의 관계를 잘 묘사한다. 여왕은 윈스턴 처질 총리와의 대화에서 빅토리아왕조시대 저명한 언론인였던 월터 배젖(1826~1877)의 말을 인용하여 "영국 헌법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군주의 위엄과 정부의 효율이다. 이 둘 사이의 신뢰 관계에서 협력할 때 국가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라고 말한다. 여왕은 군주와 정부 사이에서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군주제 폐지론 대두를 잠재우며 안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전 세계인들이 서거한 여왕을 칭송하고 존경을 표하는 이유이다. 찰스 3세의 왕비가 된 커밀라는 "여왕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독한 여성 지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정립했다"라는 평가는 의미 심장하다(박소영, 2022). 같은 여성으로서 남성들이 놓쳤던 여왕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여왕이 남성 중심사회에서 고독한 여성 지도자였지만 높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면, 영국과 영연방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었던 여왕 서거 이후 영국과 영연방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이며, 새로 즉위한 국왕 찰스 3세는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 것인가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장례식에서 여왕의 의전장이 지팡이를 부러뜨려 관 위에 올리는 것으로 여왕을 위한 복무가 끝났음을 알렸을 때, 여왕의 임무 역시 모두 끝나고 영면에 들어갔다(정철환, 2022).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여왕에 대한 평가는 깊은 울림을 준다. "영국인에게 그녀는 한 나라의 여왕이었습니다. 전 세계인에게 그녀는 단 하나뿐인 여왕이었습니다."(볼리, 2022). 


저자도 지난 70년 동안 1.06kg에 달하는 왕관(제국관)의 무게를 견뎌내고 놀라울 정도로 한 인간으로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군주로서 존엄성을 지킨 여왕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다. 여왕의 추모 기간에 쏟아지는 뉴스와 기사를 보고, 지나간 드라마와 영화를 보았다. 여왕에 대해 쓴 문헌들을 읽어보았다. 여왕은 현대사회에서 군주제의 시대적 소명과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국과 세계에서 요구하는 시대적 가치와 변화상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고 법고창신(法古創新)하려고 노력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입헌군주제의 기본원칙을 지키면서 정부 뒤에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지만 오히려 주연급보다 빛이 더 났다. 영국 헌법이 담고 있는 군주의 '존엄'과 정부의 '효율'이 조화롭게 화음을 낼 수 있도록 기여했다. 전국에서 2분간 묵념과 스코틀랜드 전통악기 백파이프 연주로 여왕을 배웅하는 장례는 막을 내렸다. "그대여, 이젠 고이 잠들게나. 이제는 그만, 꿈을 꿔도 될지니." 생전의 여왕이 자신의 장례식곡으로 고른 곡이다. 여왕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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