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Oct 13. 2022

공선사후 ①

프로레슬러 김일의 고향사랑

우리나라 6, 70년대는 가난했지만 잘 살아보자는 결기로 똘똘뭉쳤던 시기였고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 제단에 피를 바친 시기이기도 했다. 국민들은 흑백텔레비전의 스포츠 경기 중계방송을 듣거나 보면서 일상의 암울함과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었다. 권투의 김기수, 유제두, 홍수환, 프로레슬링의 김일, 장영철, 천규덕, 그리고 축구의 이회택, 김재한, 허정무, 차범근 등 이름만 들어도 주인공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출한 스포츠 스타들이 안방을 독점하고 국민들에게 위안을 선사했다. 어떤 경기든 한・일전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일본과의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몸이 으스러지도록 뛰었다. 특히 프로레슬링은 쇼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에서 텔레비전은 1950년대 중반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6~24㎞에서만 볼 수 있었고 방송이 나오는 지역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17인치 수상기의 보급대수는 250여 대에 불과했으며 1대 가격이 그해 한국의 1인당 GNP 7만 환의 5배가 넘는 37만 5,000환으로 일반 국민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거금이었다. 1960년대 텔레비전 방송국이 잇달아 설립되면서 외국산 및 국산 흑백텔레비전 보급이 본격화되었다. 1961년 국영방송국인 KBS, 1964년 TBC, 1969년 MBC 등 텔레비전 방송국이 연이어 개국하였다. 1966년 8월 금성사(현재 LG전자)에서 19인치 국산 흑백텔레비전을 처음으로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텔레비전 보급의 길을 열었다. 국산 흑백텔레비전은 수입 텔레비전에 비해 저렴하였지만 한 대 가격이 6만 8,350원으로 당시 대졸자 초임 1만 5,000원의 4배, 쌀 27가마에 상당하는 금액이었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성인들은 아씨(1970년), 여로(1972년)와 같은 드라마에 푹 빠져 들었고, 청소년들은 마징가 Z(1975년)와 같은 만화나 타잔(1970년대)과 같은 권선징악형의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저자도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주말과 공휴일에는 또래들과 타잔이나 수사반장을 보기 위해 면소재지로 원정을 가곤 했다. 감수성이 민감하고 모방 심리가 활발한 십대의 저자와 친구들은 타잔놀이를 하면서 타잔이 동물들을 불러들이면서 질러대는 “아으아으아~" 괴성 소리를 따라 하곤 했다. 타잔이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타잔의 여자 친구 '제인'은 소꿉놀이에서도 여자 아이들의 애칭이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4, 5학년이 되었을 즈음 우리 집에 흑백텔레비전이 들어왔다. 삼성전자의 흑백 이코노 TV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코노' TV라는 명칭은 전원을 켜면 예열 없이 화면이 바로 켜지는 ‘순간 수상(瞬間受像)’ 방식 브라운관을 채택한 절전형 제품이었습니다. 석유파동 이후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벌이는 분위기를 적절하게 활용한 판촉 전략이었다. 우리 집에도 저녁 시간에는 드라마 팬들이 몰려들었고 주말에는 동네 꼬마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텔레비전을 얼마만큼 주민들에게 개방하느냐는 곧 인심이 후하냐 박하냐의 척도가 되었다. 어떤 집에서는 텔레비전의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워놓고 다녔다.


비싼 돈을 주고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여놓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기가 일찍 들어온 내륙 지역과 전기가 늦게 들어간 섬 지역은 또 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섬지역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려면 배터리에 충전을 해가지고 와야 했다. 무거운 배터리를 리어카에 싣고 충전소에 갔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이나 홍수환 선수의 권투를 보면 날이면 면소재지 배터리 충전소는 마을에서 온 손님들로 긴 줄을 서야 했다. 텔레비전을 보다 배터리가 약해지면 화면이 줄어들었다. 중계방송을 하는 날에 자녀들은 학교에 가면서 부모에게 몇 번이고 확인을 한다. "아부지!! 꼭 배터리 충전시켜 와!!” 지금 생각하면 문명의 이기는 덜 발달되었지만 공동체에는 따뜻한 정감이 넘쳤고 따뜻한 인간성을 가진 시기였다.


프로레슬러 김일(1929~2006)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서론이 길어졌다.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링은 흑백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권투나 축구는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들어도 감이 잡히지만 레슬링은 텔레비전으로 보는 재미가 있어야 했다. 김일 선수는 전남 고흥 거금도(居金島) 출신이다. 거금도는 우리나라 섬들 중 열 번째로 큰 섬이다. 거금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거대한 금맥이 있는 섬’이다. 거금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조선 중기의 문헌에 ‘거억금도(巨億金島)’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지명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금은 고흥 반도에서 자동차로 소록도를 거쳐 거금도로 갈 수 있다. 2011년 연륙교를 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김일 선수하면 반칙을 일삼는 얄미운 일본 선수를 박치기 한 방으로 링에 눕히는 박치기왕으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저자는 그를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0년대 말 김일 선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박 대통령도 프로레슬링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김일 선수에게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라고 했다. 김일은 "고향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주민들이 김 수확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저의 레슬링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볼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김일은 야간에 등잔불에 의존해 김을 따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지역주민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6개월 뒤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왔다. 거금도는 전국의 섬들 중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기가 맨 처음 들어왔다(조홍복, 2021). 대통령이 김일 선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는 개인적인 보상이 아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지역주민들을 생각했다. 공선사후(公先私後)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서 공선사후는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고, 사사로운 일은 나중으로 미룬다'로 정의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선공후사(先公後私)라고 말한다.


김일 선수가 자신이 한 일을 공선사후라고 표현한 것을 알면 손사래를 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질문에 평소 마음에 두었던 생각을 이야기했던 것뿐인데 공선사후의 모델인 양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자신을 영웅시하는 것에 부담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생각해보자. 사람이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돌아오는 상황에서 그 본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김일 선수 역시 운동선수들을 생각하면 체육관을 짓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농촌 그것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거금도와 같은 섬 주민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자신의 고향에 전기개통을 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거금도에 전기를 개통하는 일은 김일 선수가 낳고 자란 지역공동체의 많은 사람을 위해 한 일이고, 체육관은 김일 선수를 포함하여 개인의 이익이 걸린 사사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자가 김일 선수의 선행을 공선사후로 과대 포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요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공선사후는 논어나 맹자와 같은 성현들의 문헌에 나온 사자성어가 아닌 조어다. 요즘 공직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공(公)을 우선시해야 하는 공복(公僕)들이 사적인 이익을 앞세워 국민들의 혈세를 가로채거나 남용하는 일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공적 지위를 이용해 공적 가치를 훼손하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공직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선사후를 아예 학교의 인재상으로 규정하는 대학도 있다. 고려대학교는 '공선사후의 애국애족적 지도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공선사후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는 데 앞장선 인촌(仁村) 김성수(1891-1955)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촌이 보성전문을 인수하고 오늘의 고려대학교를 세웠으니 고려대는 설립자의 건학 의지를 계승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설립자의 뜻도 중요하지만 공선사후 할 수 있는 인재라면 환영하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 싶다. 


다시 김일 선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일 선수는 고흥에서 씨름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레슬링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는 함경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약하는 역도산(본명 김신락 1924~1963)을 스승을 삼기 위해 일본 밀항을 시도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어 구치소에서 1년을 살았다. 구치소에서 김일은 역도산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 문하생으로 받아달라고 간청을 했다. 1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받은 역도산도 마음을 열고 김일을 제1기 문하생으로 받아들인다. 김일의 문하생 동기로는 2m 8cm의 거인 자이안트 바바(1938~1999)와 정치인, 엔터테이너로 변신한 안토니오 이노키(1943~2022)가 있다(정영재 b, 2018). 세 사람은 한국과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열었으며 세계적인 대선수로 성장하였다. 역도산 문하생 중 김일 선수가 가장 연장자였고 이노키와는 룸 메이트로 서로 친했다고 한다. 이노키는 말년 투병 생활하는 김일 선수의 병원비를 전달하기도 했다(정영재, 2022). 링 위에서는 맞수였지만 링 밖에서는 같은 스승을 둔 문하생으로서 우의를 나누는 절친이었다.


김일이 역도산의 문하생으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일화와 훈련과정을 보면 그가 프로레슬러로서의 투지와 성실성 그리고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승 역도산은 김일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켰고, 자신의 필살기인 박치기를 전수했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나무에 문지르고, 멀리서 뛰어나 벽에 부딪히게 했다(정영재 b, 2018). 김일 선수가 우리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주특기 박치기는 훈련으로 다듬어졌다. 오늘날 이와 같은 훈련 방식은 비윤리적, 반인권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김일 선수와 관련된 영화가 <반칙왕>이다. 영화는 고흥 거금도 소재 김일기념체육관 백종호 관장이 실제 주인공이다. 백 관장은 고흥 출신이자 씨름선수 출신으로 김일 선수와는 선후배사이었다. 1972년 당시 은행원이었던 백 관장은 김일 선수가 박정희 대통령 하사금으로 받은 3억 5천만 원을 은행에 예치하기 위해 김일 선수를 찾아갔다가 레슬링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백 관장이 김일 선수에게 레슬링을 해보고 싶다고 하자 김일은 "몸부터 만들게"라며 헬스클럽을 소개해주고 자신은 해외로 갔다(정영재 b, 2018). 6개월 후에 나타난 김일 선수는 박 관장에게 박치기를 한 방 먹였다고 한다. 대개 박치기를 한 방 먹은 레슬링 지망생들은 나가떨어지고 말지만 박 관장은 꿋꿋하게 버텼고 결국 김일 문화생이 되어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었다. 박치기를 견디느냐의 여부가 문하생이 되느냐를 판가름했다. 백 관장은 거액의 하사금도 예치하는 일거양득의 성과를 올렸다. 


김일 선수는 은퇴 후에 고흥의 수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변함없이 고흥의 지역주민과 고흥을 위해 베풀기를 좋아했고 그런 그를 고흥 사람들은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가 거금도에 전기를 들어오게 한 것만 해도 고향을 위해 큰 일을 했지만 평생 고향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 시절 국민들은 김일 선수의 박치기를 보고 시름을 잊고 즐거워했지만 그는 그 박치기 후유증으로 노년을 병원신세를 지면서 지냈다. 김일 선수의 수제자이면서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대표는 스승의 박치기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제대로 받히면 안 넘어가는 선수가 없었다. 링을 지탱하는 쇠기둥을 받으면 기둥이 '딩~'하고 울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위력을 지닌 박치기를 한 장본인인 김일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박치기를 하기 싫다. 팬들이 원하니까 하는 거다. 박치기 한 번 하면 머리에서 종소리가 난다."(정영재 a, 2018).  김일 선수는 목숨을 걸고 박치기를 했다. 국민들이 열광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박치기를 했다고 한다. 김일 선수에게 박치기가 재능이라면 그 재능을 살려 공선사후의 미덕을 발휘했다. 김일은 임종하기 이틀 전에 백종호 관장에게 "백군아, 나 머릿속에 큰 돌멩이가 있는데 그거 좀 빼주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큰 돌멩이가 저자의 머리를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얼마나 많은 박치기를 했기에 머릿속이 큰 돌멩이로 변했을까 싶다. 박치기를 할 때마다 얼마나 아팠을까. 김일 선수는 1958년 프로레슬링에 데뷔하여 3,000여 차례 경기를 치렀다. 김일 선수에게 박치기는 개인적으로 타이틀을 획득하고 그 타이틀을 지켜내는 영광의 징표였지만, 그 자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박치기를 한 것이다. 김일의 박치기를 공선사후로 평가하고 싶은 이유다.  



손원천. (2012). 서울신문.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 전남 고흥 거금도. 8월 23일.

정영재 a. (2018). 중앙선데이. “종합격투기 원조는 프로레슬링 … 지금 환생하면 UFC에 적수 없을 것”. 1월 7일. 

정영재 b. (2018). 중앙선데이. 박치기왕 임종 이틀 전…“내 머릿속 큰 돌멩이 좀 빼줘”. 1월 28일.

정영재. (2022). 중앙선데이. '역도산 사단' 룸메이트 김일과 혈전, 알리와 세기의 대결도. 10월 15일-16일.

조홍복. (2021). 조선일보. ‘박치기왕’ 김일 동상, 고향 고흥 거금도에 세웠다. 12월 30일.

반칙왕. (2000). 영화.

역도산. (2008). 영화.

<텔레비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작가의 이전글 엘리자베스 2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