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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23. 2022

공선사후 ②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차임 바이츠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인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한 신무기들이 선을 보인 전쟁이기도 했다. 독가스, 철조망, 기관총, 포탄 등.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축적된 과학기술이 가공할 전쟁무기를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기관총만 해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기관총은 1800년대 중반 개발될 때만 해도 분당 300발 정도 발사되었는데, 1800년대 후반에는 분당 600여 발을 발사하게 되었다. 몇십 년 사이에 두 배가 넘는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저자는 기관총을 생각하면 동학농민항쟁(1894년)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들이 일본군 기관총 앞에 쓰러져 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다. 충청감영이 위치한 공주는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군에게 모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동학의 남・북접 연합군은 감영을 공격하기 위하여 공주로 진격하던 중 우금치 고개에서 관군・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 근대의 신식 무기로 무장했지만 농민군은 죽검과 죽창을 들었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지만 패배로 끝나면서 농민항쟁이 실패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혹자는 '우금치 전투'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우금치 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김종회, 2019). 왜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동학농민군이 조선의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우금치 전투는 관군과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였기 때문이다. 전투란 어느 정도 전력이 팽팽한 가운데 밀고 밀리는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농민군은 절대적인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성능이 우수한 무기를 갖춘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우금치에서 일본군이 농민군을 어떻게 학살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은 수만 명의 농민군을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으로 도륙한다. 농민군은 추풍낙엽이 되어 산을 덮었다.


포탄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바꾼 게임 체인저였다. 포병의 공격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은 1억 7천만 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했다. 영국군이 발사한 포탄은 하루 평균 10만 발이 넘었으며 1917년 9월 어느 날 영국군은 100만 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쌍방이 지루한 참호전을 펼치게 되는데 참호 속의 적을 공격하고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포탄으로 상대의 진지를 포격해야 했다. 영화 <참호전>과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그리고 있는데 병사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포격이었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양측은 상대방에게 수시로 포격을 가했다. 적군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포격을 하는 것말고는 별다른 수단이 없었다. 날아온 포탄이 참호 근처에서 터지면 파편이 날아왔고, 참호 내에 터지면 병사들은 집단으로 사망했다. 영국이 포탄을 제조할 수 없다는 것은 적군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한다는 의미다.


영국은 포탄 제조에 필요한 핵심 원료인 초석(硝石, saltpeter)을 칠레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 영국은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 즉 독일이 영국의 해상봉쇄 작전에 맞서 잠수함을 이용하여 연합국과 중립국 선박에 무제한의 공격을 펼치게 되면서 초석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 초유의 비상사태였다. 포탄 제조 원료가 없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뿐더러 전쟁을 지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세톤을 사용하면 포탄을 제조할 수 있었다.


이때 유대인 출신 생화학자 차담 바이츠만(1874~1952)이 주목받게 된다. 바이츠만은 1910년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에서 설탕을 이용한 인조고무 제조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아세톤의 제조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던 아세톤 제조 방법은 영국이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빛을 발휘했다. 영국의 군수부 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아세톤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바이츠만에게 아세톤의 생산을 의뢰했다. 바이츠만은 아세톤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영국을 전쟁 위기에서 구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홍익희, 2022). 조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총리(재임 1916~1922)가 되어 전시내각을 이끌었는데 종전 후 영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큰 도움을 준 바이츠만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바이츠만은 개인적인 보상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래전부터 시온주의 운동, 즉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해 온 바이츠만은 아세톤 개발에의 공헌을 통해 얻은 정치적 발언권을 유대 국가 재건에 적극 활용하려 했다. 그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벨푸어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총리를 역임)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유태인 국가의 재건'을 영국이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1917년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 나오게 된 결정적인 배경 중 하나이다.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내용의 편지다.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장관은 라이어닐 월터 로스차일드 남작의 집에 들러 편지를 손수 건넸다. “본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를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의 시민적,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1917년 벨푸어 선언 참조). 편지의 내용이 국가의 중요한 선언이 되고 이 선언을 토대로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 외무장관이 개인의 사택에 방문하여 편지를 직접 전달했다고 한다. 영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중차대하고 긴급한 사태에 직면하였으면 그런 행동을 했겠는가 싶은 궁금증이 증폭된다.  


사실 영국은 밸푸어 선언이 나오기 전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기로 비밀리에 약속했었다. 비밀 서한은 영국 정부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쳐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이었던 헨리 맥마흔이 아랍의 성지 메카의 부족장인 후세인 빈 알리에게 전달한 전시 외교정책의 기조였다. 서한에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랍도 영국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었다. 아랍은 오스만 터키 제국과 같은 이슬람 형제 국가로서 영국에 성전(지하드)를 선포한 상태였다. 종교적으로 도저히 영국을 돕기 힘든 형편이었지만 아무리 종교적으로 동일시하는 국가라도 식민지로 사는 것보다 독립해서 사는 것이 났다는 판단에서 영국을 돕기로 결정하게 되었다(이희수 외, 2004). 심지어 영국은 1916년 러시아의 동의 하에 프랑스와 비밀리에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체결하여 아랍에서 오스만 터키 제국이 멸망하면 어떻게 땅을 분할지배할지에 대해 결정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즉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 정도를 공유하고 모든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직접 지배하기로 했다(안남식, 2021 참조). 강대국의 이중, 삼중이 밀약외교는 오늘날 중동 국가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난맥상의 근인(近因)이 되었다. 마치 국가의 외교정책이 다단계 사기꾼과 같이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저급하고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 토마스 로렌스(1888~1935)와 아랍 유목인 베두인족이 오스만 터키 제국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다. 로렌스는 아랍의 독립을 위해 싸워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받게 된다. 그를 아랍 민족운동의 원조로 부르는 이유다. 그는 아랍 전사들을 이끌고 터키군들과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베두인은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영국에 협조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랍국가를 세우는 데 지원하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영국은 불리한 전쟁에서 아랍인의 협력을 이용한 뒤 '후세인-맥마흔 서한'에서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했다. 토사구팽의 전형이다. 영국은 국제 외교에서 신뢰를 저버리고 두고두고 비난받을 짓을 했을까? 영국이 아랍 민족과의 약속을 배반한 이유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외교전략 때문이었다. 첫째는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금융계의 큰손이었던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유대계 자본이 영국의 전쟁 공채를 사주지 않는다면 독일 동맹국들과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의 외무장관이 로스차일드의 사택에 직접 찾아가 편지를 전달한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1917년 영국은 전비가 바닥났다. 믿었던 러시아조차도 볼셰비키 혁명으로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연합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설상가상의 상황에서 처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는 했지만, 미국 병사들도 유럽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지를 약속하면서 유대 금융인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김현민, 2019). 둘째는 포탄 제조에 필수 원료인 칠레산 초석의 수입이 막혔을 때 포탄 제조에 들어가는 아세톤의 대량생산기술을 유대인 과학자 바이츠만이 갖고 있었다(권홍우, 2016).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과 기술을 가진 국가와 개인이 갑(甲)이 아니겠는가. 셋째는 영국은 전쟁에서 고전하면서 항복까지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의 참전을 학수고대했지만 불간섭주의를 내세운 미국은 참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미국의 금융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를 움직이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아랍에 유대국가건설이라는 시온주의라는 미끼를 던져야 했다. 영국은 전쟁을 계속 수행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본, 기술, 미국의 참전이라는 세 가지 열쇠가 필요했고, 공교롭게도 이 세 가지 열쇠는 유대인들이 열 수 있었다.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통치했던 영국도 국익 앞에서는 '해가 비추지 않은' 어두운 곳에서 밀약 외교를 서슴치 않았고 국제 간의 신성한 약속도 헌신짝 버리 듯하였다.


여기서 유대인의 시오니즘을 실현하도록 지원한 최고의 공로자 중 한 사람은 에드몽 로스차일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887년 팔레스타인 땅을 비밀리에 사들여 이주 유대인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이주민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마련해 준 땅은 80%에 달했다(홍익희, 2022). 개인이 하는 기여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진 자본과 기술을 시오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거래로 삼았다. 영국은 유대인들과의 거래를 수용하고 유대인들을 위한 요구에 따라 움직였다. 금융계를 휘어 잡고 있는 유대인들의 파워는 영국이 아랍 민족과의 약속을 뒤집게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 특히 포탄 제조에 필요한 아세톤 기술을 개발한 바이츠만의 기여는 영국이 벨푸어 선언을 하게 만든 결정타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바이츠만은 영국 총리의 보상 계획에 개인적인 요구를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가 생각하는 최우선 과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세우는 시오니즘(Zionism)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공선사후다. 유대인이 영국으로부터 맥마흔 서한을 포기하고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낸 것은, 금융계의 큰 손이었던 로스차일드보다는 아세톤 대량 생산기술을 보유한 바이츠만에게 주목하는 이유다. 영국은 로스차일드가 가진 금융계의 영향력에 바우츠만의 국가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에 국가의 외교정책을 변경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벨푸어와 바우츠만은 오래전부터 친밀한 관계였던 것 같다. 1906년 벨푸어가 총리직에 물러난 뒤 바우츠만이 시오니즘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영국 식민지 우간다에 유대민족 국가를 세우는 방안은 어떻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바이츠만은 "모세가 그 얘기를 들었다면 십계명 판을 다시 깨트렸을 겁니다. 누군가 선생께 런던 대신 파리를 준다면 받으시겠습니까?’라고 답변했다. 벨푸어는 웃으면서 “하이츠만 박사, 우리에겐 이미 런던이 있소”라고 되받았다. 바이츠만이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요. 한데 우리에게는 예루살렘이 있었죠. 런던이 늪지대였을 때 말입니다.”(권홍우b, 2016) 벨푸어와 바이츠만 사이에 오간 농담조의 대화를 되새겨보았을 때 이 대화가 오고 간지 11년 후에 벨푸어 선언이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은 국가의 위기에서 절대적인 기여를 한  바우츠만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보상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농담이 진담이 되고 우연이 필연이 된다.


영국의 모순된 외교정책은 전후 아랍에 대파란을 몰고 왔다. 영국은 무력으로 아랍계 팔레스타인 주민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유대 민족 국가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물론 벨푸어 선언에서처럼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시오니즘이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질 수 있는 토대는 벨푸어 선언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중심인물에는 생화학자 차임 바우츠만 박사가 있었다.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 세력과 아랍 세력 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중동 지역은 적대적 대치 상태에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근거로 이스라엘 건국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전쟁에서 이용한 뒤 토사구팽 했던 사건은 국제 외교의 나쁜 사례로 기록된다. 국익을 놓고서는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이 된다. 이스라엘 건국 후 국민들은 차임 바이츠만을 시오니즘 실현의 공로를 인정해 초대 대통령(재임 1949~1952)로 추대한다. 바우츠만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에드몽 로스차일드가 한 말을 기록해 두었다. “내가 없었다면 시오니즘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오니즘이 없었다면 나의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김현민, 2019) 바우츠만은 로스차일드에게 공로를 돌리는 겸허함도 잊지 않았다.


이희수 외. (2004). 이슬람. 청아출판사.

권홍우a. (2016). 서울경제. 중동 비극의 씨앗, 벨푸어 선언. 11월 2일.

권홍우b. (2016). 서울경제. '초대 대통령' 바이츠만. 11월 9일.

김종회. (2019). 전북도민일보. 1894 우금치전투는 학살이었다. 7월 11일.

김태우. (2021). 자유아시아방송. [김태우] 이스라엘-하마스 충돌과 이어언돔 . 5월 19일.

김현민. (2019). 아틀라스. 로스차일드의 비밀 ⑨… 팔레스타인 건설하다. 12월 1일.

박흥수. (2014). 프레시안.  자본주의의 '장자', 1차 세계대전. 12월 28일.

안남식. (2019). 시사인. 중동 분쟁의 뿌리,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2월 21일.

이춘근. (2014). 미래 한국. 참호전, 인류 최초 과학전쟁이 시작되다. 5월 22일.

하채림. (2017). 연합뉴스. '이스라엘 건국 실현 방아쇠' 밸푸어 선언 100년... 극과 극 평가. 11월 1일.

홍익희. (2022). 조선일보. 1차 대선 때 영국 구하고, 이스라엘 건국 지원 받아냈다. 10월 4일.

홍익희. (2022). 조선일보. "방위산업에 국운 걸려" 軍에서 대학보다 먼저 컴퓨터 가르쳤다. 

녹두꽃. (2019). 드라마.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022).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1998). 영화.

참호전: 포비든 그라운드. (2014).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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