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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03. 2023

미처 몰랐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지킴이, 안의와 손홍록

조선왕조실록(별칭은 '조선실록')은 국보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이다. 고문서로서 국내외에서 역사적,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실록은 태조(1392년)부터 철종(1863년)까지 472년간에 걸쳐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年月日)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조선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인류 역사를 놓고 볼 때 단일 왕조의 기록으로는 가장 길고 가장 규모가 큰 기록 문화의 정수다. 길이와 규모로 따지자면 중국엔 만리장성,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다고 할 것이다. 왕조사를 기록했다고 해서 실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객관성과 공정성이 지켜져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일본 학자의 간섭 아래 편찬돼 실록의 가치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일본제국의 관점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조선실록의 편찬 원칙은 제3대 임금 태종대에 정립됐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1408년(태종 8년) 승하한 이듬해 태종은 하륜에게 ‘태조실록’을 편수(編修, 여러 자료를 모아서 책을 만듦)하도록 명한다. 하지만 태조와 함께 활동한 신하들이 생존해 있는 당대에 실록을 편찬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 등 여러 신하들의 반대가 잇따랐다. 춘추관 기사관 송포(宋褒) 등이 상소를 올랐다. "오늘날 전하의 문무 신하들이 모두 태조 때의 신하들인데, 태조의 신하로서 태조의 역사를 편찬하면, 후세에 태조를 의논하는 자들이 그 공렬(功烈, 드높고 큰 공적)·덕업(德業)의 성(盛)함과 규모(規模)·강기(綱紀)의 큰 것을 보고 반드시 말하기를, ‘한때의 신하가 포미(褒美, 포장하고 아름답게 꾸밈)하였기 때문에 믿을 글이 아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태조의 혁혁한 공렬로써 장차 후인의 이목에 의심을 남기게 되니, 어떠하겠습니까?"(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9월 1일) 예조 판서 이응(李膺)도 "같은 때의 사람이 같은 때의 일을 찬수(撰修,책이나 문서 따위를 저술하고 편집함)하면, 어느 누가 갖춰 쓰고 곧게 써서 화(禍)를 당하려 하겠습니까? 신도 또한 하지 못하겠습니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9월 8일) 신하가 자신이 모셨던 국왕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쓸 수 있겠으며, 설령 기록으로 남겼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믿겠느냐는 것이다. 인지상정의 인간 감정을 헤아려 경계하자는 말이다. 


조선 왕조에서 역사에 관한 기록만큼은 국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갑론을박 끝에 조선실록의 편찬 원칙이 정해졌다.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사관은 항상 임금 곁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꼼꼼하게, 소신껏 기록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국왕도 역사 기술에 관해서 만큼은 사관(史官)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였다. 사관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왕조사를 기록했다. 둘째,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임시로 실록청을 만들어 실록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셋째, 국왕일지라도 선왕(先王)의 기초자료인 사초(史草)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고, 사관 이외에는 실록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사화’(史禍)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실록에는 비장한 숭고미(崇高美)를 간직하고 있다. 


사초가 사화로 이어진 역사를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보았다. 무오사화는 조선실록의 사초 문제로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숙청당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사초를 볼 수 없다는 조선실록 편찬의 원칙을 어기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1498(연산군 4) 7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이 설치되었다당상관에 임명된 이극돈(李克墩)은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실린 것을 발견했다조의제문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회왕(楚懷王)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세조를 항우에,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은근히 비난하는 내용이었다(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7일). 세조의 자손인 연산군이 세조를 왕권 찬탈자로 비유한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할 리 없다. 국왕이 사초를 열람한 순간 파국은 예상되었던 것이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던 일.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를 당했다. 역사는 연산군을 폭군으로 단죄하지만 진즉 더 큰 죄는 지켜야 할 조선실록의 편찬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백 년 가까운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실록이 오늘날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된 과정을 알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조선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였으며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장구한 역사의 기록을 편찬 원칙을 지키면서 해냈다는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결코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은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각 지역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내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세종 때에 경상도 성주와 태조 어진(御眞)을 모시는 전주 경기전내에 실록각을 추가로 설치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빼고 경복궁, 충주, 성주의 사고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사고가 병화(兵火)로 불탄 것은 조선 역사가 사라진 엄청난 사건이다. 다행하게도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실록만은 전란 중에도 지켜졌다. 어떻게 지켜냈을까?


조선실록을 지켜낸 주인공은 관리도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다. 전라도 정읍의 유생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錄, 1537~1610)이 그 주인공이다. 안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홍록과 함께 의곡계운장(將, 전란 중에 쌀과, 의복 등 군량품을 모아 임금과 의병들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총괄하는 직책)이 되어 곡식과 포목을 행재소(行在所, 정궁 외에 왕이 임시로 정무를 볼 수 있는 장소)로 수송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안의는 이순신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에 정읍현감을 지냈다. 이순신은 1589년 12월부터 1591년 3월까지 1년 4개월간 현감으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때 이순신은 지역에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안의와 자주 만나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안의는 이순신과의 대화를 통해 왜가 곧 침략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은밀히 곡식을 모아 두었다고 한다. 안의의 우국충정과 유비무환을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전쟁으로 국토가 전쟁으로 유린되는 가운데 전주 사고(史庫)가 소실될 것을 우려하여 전라감사 이광의 재가를 얻어 조선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태조에서 명종까지 실록이 47궤였고, 고려사와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 모두 합해 60여 궤로 총 1300여 권의 엄청난 분량이었다. 일행은 왜 첩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곡식과 짐을 잔뜩 싣고 피난을 가는 호족처럼 위장을 했다. 내장산(內藏山)은 글자 그대로 '산 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란 중에 내장산은 산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조선실록을 산으로 옮긴 그들은 조선실록을 지켰던 사실을 기록한 임계기사(壬癸記事)를 남겼다. 임계기사는 임진년과 계사년 2년 동안의 기록을 의미하는 데 수직상체일기(守直相遞日記, 안의와 손홍록이 서로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서면서 쓴 일기) 또는 안의의 난중일기(亂中日記)로 불린다. 일기에 따르면 안의 혼자 수직한 날은 174일, 손홍록 혼자 수직한 날은 143일, 두 사람이 함께 수직한 날은 53일로 모두 370일 동안 혼자 또는 함께 실록과 어진을 지켰다고 날짜별로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임계기사는 안의와 손홍록이 조선실록, 아니 조선의 역사를 풍찬노숙하며 지키면서 기록한 위대한 서사이다. 이 기록물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1592년~1598년까지 약 7년여에 걸쳐 진행됐던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두 왜란(倭亂) 동안 어진과 실록이 지켜졌던 이안(移安, 신주나 영정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심)의 역사 전반을 기록한 국보급 기록물이다.  


조선 실록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와의 싸움은 지키려는 자의 간절함과 비장함이 한수 앞섰다. 내장산 깊숙이 숨겨졌던 조선실록은 국왕의 명으로 충청도 아산으로 이안되었다가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하자 아산에서 해주, 강화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에 이안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 전세에 따라 안전한 보관처를 찾아 옮겨다녔다. 조선실록은 전쟁 후 다시 배행(陪行)에 나선다. 묘향산에서 영변을 거쳐 강화도로 이안되어 봉안되었다. 10여 년 동안 무려 2천여 리를 옮겨 다녔다. 배행 과정에서 안의는 병으로 죽지만, 손홍록은 끝까지 조선실록의 이안 임무를 완수하며 초심을 지켰다. 


조선은 왕조실록이 멸실될 위기에서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실록을 천신만고 끝에 보존할 수 있었다. 전쟁 후 조선은 실록을 복인(複印)하게 되는데, 전주사고 실록을 저본으로 하여 방본(傍本) 1질과 신인본(新印本) 3질 등 모두 5질을 마련하였다. 실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한 이중화 내지는 삼중화 조치다. 전쟁 후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 선택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과 달리 읍치(고을 수령이 일을 보는 관아가 있는 곳)가 아닌 산중과 섬을 선택했다.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외사고는 조선 전기의 읍치와는 달리 산중과 섬에 위치하였고, 수호와 관리는 관원이 아닌 승려에게 맡겨졌다.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명분보다는 안전하게 사고를 보존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관리 책임자를 두고자 했다. 사고 보존의 임무를 승려에게 맡기고 이들의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다섯 곳에 보관해 온 실록 중 춘추관사고본을 제외한 네 곳의 실록을 보존할 수 있었다


왕조시대나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한 자료 또는 기술의 이중화, 삼중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2022년 10월 카카오에 문제가 생겨 대한민국 국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초연결사회 대한민국이 초먹통사회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일어날 수 있지만 진즉 더 큰 문제는 페일오버(failover)의 실패에 있었다고 한다. 페일오버는 컴퓨터 서버, 시스템, 네트워크 등에서 이상이 생겼을 때 이와 동일한 예비시스템으로 자동 전환하는 기능을 말한다. 페일오버에 실패한 부가통신서비스 플랫폼을 보면서 조선왕조실록을 이중화, 삼중화했던 선조들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되새김질해 본다(정진홍, 2022).


우리나라는 매년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선포했다. 6월 22일은 안의와 손홍록 등이 조선왕조실록을 전주사고에서 내장산으로 이안한 날이다. 문화재청과 (사)한국문화재지킴이 단체연합회는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전란의 위기에서 보호하고 후세까지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한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제정했다. 2018년 6월 경복궁 수정전에서 선포식을 가졌고, 내장산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내장산 용굴(龍窟) 입구에는 조선왕조실록 내장산이안사적기(朝鮮王朝實錄 內藏山移安事績記)라는 긴 표지석이 있다. 1991년 정주시장 명의로 조선실록이 내장산에 이안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기록된  왕조의 역사, 그것도 국왕조차 볼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얼과 혼이 담긴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 기록의 대역사가 드라마, 영화, 판타지, 뮤지컬, 웹툰 등 수많은 콘텐츠로 탈바꿈하여 우리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고 있다. 안의와 손홍록과 같은 유생과 무명의 문화재 지킴이가 아니었다면 조선역사의 숨결은 끓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민족의 문화와 역사가 없다면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시 확인한다. 


송기동. (2022). 광주일보. 생생한 조선시대 역사 ‘타임캡슐’이 열리다. <제3부> 전라도, 문화예술 꽃 피우다 ⑤ 조선왕조실록. 11월 08일. 

정진홍. (2022). 조선일보. 카카오 사태와 조선왕조실록. 10월 19일.

https://www.archives.go.kr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보존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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