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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10. 2023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저자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0년,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대학 본고사 폐지와 함께 계열제 입학제도와 졸업정원제를 실행했다. 오늘날에야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민감한 대학입학제도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독재정권의 대통령 한마디는 곧 정책이나 제도로 만들어졌다. 여반장(如反掌)이라고 할까. 대학입시에 관한 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불법 정권 탈취에 항쟁으로 맞섰던 광주 지역의 고등학생은 훨씬 불리한 환경에 직면했다. 5월 휴교령이 내려 9월에야 복교했다. 소수점으로 당락이 갈리는 대학입시에서 광주 지역 수험생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였다. 그때는 시민항쟁에 대한 진압군의 무자비한 발포와 폭력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장기 휴교령에 따른 수업 손실 등을 운운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에 불과했다.


저자는 장래 직업으로 중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성격과 적성에도 맞았다. 저자는 사범대학 인문사회계열로 입학하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했다. 인문사회계열 학우들 대부분은 교육학을 전공 1순위로 생각했고, 갓 창설된 영어교육과 지원자는 기대밖으로 적었다. 한창 젊고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저자와 친구들은 영어교육과는 학문이라기보다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실용 교과 전공으로 생각했고, 차라리 영어영문학전공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처럼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같은 용어는 없었던 같다.) 저자는 교육학을 주전공으로 하면서 영어영문학을 부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교육학 전공으로 졸업하면 중등학교 일반사회 또는 윤리교사로 진출할 수 있지만, 교육학과 영문학의 결합상승을 통해 이왕이면 영어교사를 할 목표를 세웠다. 교생실습도 영어교사로 실습을 했다.


저자는 다른 과목보다 영어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외국어 공부는 시간을 투자한 만큼 성과로 나타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끼고 다녔다. 거리를 걷거나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영어로 된 상호를 눈여겨보았다가 특이한 영어식 표기는 메모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았다. 대학에서는 시사영어, 고급영어강독, 고급영작문, 무역영어 등의 과목을 수강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영어를 공부했다. 물론 선택한 영어과목의 난이도가 높아 고전을 면치 못한 경우도 있고 기대만큼 성적도 나오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었고 그때의 경험이 이후 사회생활에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직장에서도 영어 하면 저자를 떠올릴 정도로 영어를 좋아했다.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면 지금쯤 경지에 올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공부방식이나 활용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영문학 부전공은 저자에게 색다른 대학생활을 경험하게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학제 간 융합전공의 묘미를 알았다. 사범대학에서는 학교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교과목을 개설한다는 점에서 전공과목이 규범적인 특성을 나타냈다면, 영문학과에서 개설된 교과목은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끄집어내고 사고의 폭을 넓혀주었다. 죠셉 콘레드의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과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공부하면서는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문학 작품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미시>를 담당한 조운제(趙雲濟, 1930-2002) 교수님은 시인이면서 영문학자로 수업시간에 영시와 한시(漢詩)를 곁들여 설명하셨는데 저자의 눈을 붙잡았다.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호연지기를 강조하면서 틈나는 대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시를 소개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고 우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명의 시를 감상하면서 깊은 울림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증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즉 덕산 개울가 정자 기둥에 적은 시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보아라! 천석들이 거대한 종을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안나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어찌하면 요지부동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운다 해도 아니 울까나


교수님은 칠판에 일필휘지 하듯 남명의 시를 적어놓고 젊은이는 천석종(千石鍾)과 같은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 석이 120근이니 천 석이면 12만 근이다. 곡식으로 셈하면 천 섬이 들어가는 종이다. 천석종은 번개가 쳐도 끄덕 않고 의연히 버티는 천왕봉이다. 천왕봉은 곧 남명 자신이다. 교수님은 젊은이들이 천석종과 같은 기개와 호연지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수님의 말씀은 캠퍼스 밖에서 들려오는 권력 다툼과 부조리에 식상하고 있던 젊은 청년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남명 조식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 가자. 남명은 올곧은 선비의 기상을 실천한 것뿐 아니라 기이한 행동을 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남명은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문구가 새겨진 칼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뜻이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절제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밖으로는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결단력 있게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이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경의검(敬義劍)'이다. 경(敬)과 의(義)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남명은 옷고름에 '성성자(惺惺子)'라는 두 개의 작은 방울을 달고 다녔다.  '성성자'는 '깨어 있고 또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방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배운 것은 실천을 위해 존재한다는 남명의 세계관은 조선의 실천하는 양심으로서 깊은 영감을 준다. 남명은 선비가 책만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도록 독려했다. 남명의 현실 인식과 선비관은 다음의 말에 나타난다. "요즘 선비들은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라고 질타했다(노대환, 2007). 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남명의 문하생 중에는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유달리 의사와 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곽재우, 정인홍, 정구 등 무려 50여 명의 의병장이 그의 문하생이다. 남명은 외손녀 사위이기도 한 곽재우에게 직접 병법과 병학을 가르칠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실용적 지식을 갖췄다.  


남명을 바른 소리하는 선비로 만든 상소사건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남명은 상소문으로 조선 최고의 일사(逸士, 시골의 덕망있는 선비)로 등장했다. 1555년 남명은 명종(재위: 1545~1567)이 단성(현재 경상남도 산청)현감을 제수했을 때 이를 사절하는 을묘사직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를 올린다. 사직소는 신하가 임명권자인 임금에게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이 사직소는 평범한 상소가 아니었다.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됐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 그런데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주색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며 오로지 재물만 늘립니다.” 그때에 외척의 발호로 극도의 혼란에 빠진 조정과 신하들을 질타하였다. 남명은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임금의 역린을 건들었다.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 문정왕후)은 생각이 깊기는 하나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선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낱 고아일 뿐이니 백 가지 천 가지 천재와 억만 갈래 민심을 어떻게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임금이라고는 하지만 어머니와 척신들의 수렴청정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를 펼쳐나갈 것인지를 묻는다. 남명은 임금과 임금의 어머니를 향해 고아, 과부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현재 조정이 직면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통렬히 비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직언은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송의호, 2021). 우리나라 왕조사에서 남명과 같은 상소문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즉생(死卽生), 즉 죽고자 하면 사는 법이다.


남명은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영남의 쌍벽으로 불렸던 학자다. 둘은 학풍이나 기질, 삶의 방식 등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퇴계가 온유돈후형이었다면, 남명은 비분강개형이었다. 퇴계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면, 남명은 천길 절벽 같은 기상이 살아 뛰는 분이었다. 퇴계가 작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면, 남명은 처음부터 거대 지향을 가진 분이었다(이종문, 2019). 남명은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도 곧 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김진태, 2016). 남명은 12차례 유람할 정도로 지리산(별칭은 두류산)을 좋아했다. 남명은 60세가 넘어서는 아예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보이는 산청군 시천면의 덕산으로 이사하였다. 위의 시는 바로 덕산에서 지은 시이다.


스승과 제자로서 조운제 교수님과의 인연은 강의실에서만이 아니었다. 교수님 자신이 젊은이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교수님의 호방한 기개에 느낀 바가 있어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저자는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차를 마시며 졸업 후 진로 등에 대해 조언을 듣곤 했다. 사제간에 오가는 대화는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화제가 바둑으로 이어졌다. 저자의 바둑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아마추어 고수에 속하는 편이다. 공강(空講)을 이용하여 수담(手談)을 나눴다. 교수님이 저자에게 넉점을 깔고 두었다. 교수님은 기개가 넘치고 거침없이 돌을 놓았지만 정교하지는 못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바둑 자체를 즐기셨다.  


교수님은 저자와 수담 나누는 것을 즐기셨다. (강의가 끝나고 수강생들이 자리를 뜰 때면 교수님이 저자에게 연구실에 가자는 눈짓을 하셨다.) 지금이야 대학 교수 연구실에서 수담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없지만, 80년대 교수휴게실에는 으레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4학년 마지막 학기였던 저자는 수강 과목도 적고 직장을 알아보는 중이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수담을 나누는 중에 교수님은 저자의 장래 직장 등에 대해서도 물어보셨다. 공교롭게도 저자는 원하는 직장에서 낙방하여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교수님은 "대학 교직원 모집공고가 났는데 응시하면 좋겠다. 교직원은 처우도 나쁘지 않고 방학에는 단축근무를 하고 무엇보다 의지만 있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좋다"라고 하시면서 지원을 권장하였다. 사실 그때에는 저자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대학 교직원으로 취업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학 구성원으로서는 학생과 교수만을 생각했다. 오늘날에야 대학 교직원으로 취업하기도 어렵고 그 위상도 많이 달라졌다.


조운제 교수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은 저자는 교수님의 권유대로 대학 교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근무 외 시간을 활용하여 계속 공부하게 되었다. 저자가 대학 교직원이 아닌 일반 기업에 취업했으면 저자의 삶의 방향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람의 인연은 하늘이 내리고 그 관계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저자와 교수님과의 만남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생각한다. 조 교수님을 통해 인간관계 발전의 불가사의한 측면을 생각해 본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높은 산을 보면 산봉우리에서 호방하게 웃고 계시는 교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교수님이 젊은이의 호연지기를 강조하면서 지리산 천왕봉(1915m)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신 덕일 것이다. 아니면 스승을 기리는 제자의 마음이 전달된 탓일 것이다. 저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스승의 기개 넘친 웃음과 인자한 모습이 그리워진다. 교수님이 저자를 만났을 때가 지금의 저자 나이 때였다. 교수님의 초창기 대표작 샘물(1967년)을 음미하며 스승을 기린다. 저자를 사랑과 비전으로 이끌어주신 감사한 마음은 교수님의 시처럼 '버려도 버려도 또 고이는 샘물'과 같다.


<샘물>


그대 앞에선

한마디도 못한 그 많은 사연

그대 간 후에

꿈에 속삭이며 별에 속삭였소


대야의 가득한 물이라면

한번 버리면 없어지련만,

샘물인가

버려도 버려도 또 고이네.



노대환, (2007).《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경남포커스뉴스. (2019). 남명 조식 선생과 실천하는 知性. 11월 24일.

김진태. (2016). 경북일보. [김진태의 고전시담]조식(曺植)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11월 21일.

송의호. (2021). 월간중앙. [선비 정신의 미학(59)] 임금에게 직언한 선비 남명(南冥) 조식. 1월 17일.

이종문. (2019). 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 하늘이 운다 해도 조식. 7월 18일.

KBS 역사스페셜. (2012).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 남명 조식. 7월 5일.

KBS 역사의 라이벌. (1995). 조선성리학의 라이벌,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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