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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13. 2023

미처 몰랐습니다

파란 눈의 성자(聖者), 리처드 위트컴 장군

저자는 <현대인의 인문학>(고려대 출판문화원)에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호머 B. 헐버트 박사에 대해 글을 썼다. 자신의 조국보다 다른 나라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마치 낳지 않은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방한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강제병합과 식민통치에 대한 불법과 폭력을 세계에 알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헐버트가 붓으로 일제 식민지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데 헌신했다면, 여기 '파란 눈의 성자(聖者)'로 불린 미국 군인은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인도주의와 인류애를 실천하여 전후 복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리차드 S. 위트컴(1894~1982) 장군. 위트컴 장군은 와이오밍대학 ROTC 출신으로 1916년 미군에 입대해 1954년 준장으로 퇴역했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52년 한국에 부임해 부산 미 2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퇴역 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후 복구와 전쟁고아를 위해 헌신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2022년 11월 11일 리차드 S. 위트컴 장군이 서거한 지 40년이 지나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 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11월 11일은 우리나라에 특별하다. 매년 11월 11일 11시 전 세계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참전 용사들이 부산을 향하여 1분간 묵념을 하는 의식(Turn Toward Busan)을 거행된다. 숫자 일곱 개는 추모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의식은 2007년 캐나다 참전용사의 제안으로 시행되다 2008년부터는 정부행사로 격상되었다. 한국전쟁에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여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다 산화한 전우들을 향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이다. 이제 국제적인 행사가 되었다. 유엔기념묘지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 부산이 유일하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953년 7월, 휴전으로 부산에 모여든 피난민들의 귀향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부산에 남은 피난민과 새로 이주해 온 유랑민들로 부산의 인구는 증가하였다. 정부와 부산시는 전쟁 중에 무질서한 주택 문제와 도시 정비를 위해 판잣집 철거를 꾸준히 추진했으나 부실한 대책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화재의 위험은 전쟁이 끝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다. 오후 8시 20분경 당시 방에서 난로 불 부주의로 발생한 화염은 시속 11.8㎞ 강풍으로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전을 중심으로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완전 진화되었다. 이 화재로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사상자 29명, 이재민 6,000여 세대 3만여 명이 발생하였다. 피해액은 총 2000억 환으로 추산되었다. 부산역, 부산우체국, 미군후방기지사령부 등 중요 시설들이 사라졌다(부산문화역사대전 참조).


그때 부산 제2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은 상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군수창고를 개방하여 23천여 명분의 식량을 비롯해 의복 등 군수물자를 이재민들에게 긴급 지원했다. 이재민을 위한 천막을 지어 제공했다. 위트컴이 아무리 사령관이라고 해도 군인은 위계질서가 정해져 있고 정해진 임무 내에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상부의 승인을 받고 행동해야 하는 군의 성격을 볼 때 권한남용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일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미국 의회 청문회에 소환된 위트컴 장군은 추궁을 받은 과정에서 유명한 어록을 남긴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War is done by weapons and it remains undone, unless it is done for the people in the country.)” 이 말을 들은 의원들은 오히려 장군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위트컴 장군이 한국에 부임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그는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에 제격이었다. 그는 폐허가 된 한국 재건을 원조할 목적으로 한미재단을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전쟁고아를 위해 보육원을 설립하고 후원했다. 진료소 수준의 '메리놀 수녀의원'이 종합병원으로 거듭날 때 병원 신축이 공사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미군 장병에게 월급의 1%를 공사비로 기부하게 해서 공사에 도움을 주었으며 한국 국민이 전쟁의 상처를 빨리 치유하도록 교육 및 의료사업에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이외에도 이재민 주택 건설, 도로 건설, 의료시설 건립 등을 지원하고 부산대를 비롯한 각급 학교 설립을 도와 한국과 부산을 재건했다. 그가 전쟁고아와 피난민을 치료할 병원을 짓기 위해 한복을 입고 모금 운동을 벌인 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도 아닌 외국 군인이 이렇게 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1954년 1월 미국 시사화보잡지 <라이프>도 위트컴 장군이 한복을 입고 모금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실었다. 미군사령관이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상당히 이색적인 풍경이었나 보다.  그때 잡지에 실린 기사의 일부를 옮겨본다.


When U.S. troops in the war-damaged port of Pusan staged a carnival to raise funds for a hospital and six clinics General Richard S. Whitcom did his bit by showing up wearing the dress of a Korean gentleman: a white gown tied a sash and a tapering stovepipe hat with a flying-saucer brim.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부산항에서 미군이 병원과 6개 진료소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카니발을 열었을 때, 리처드 S. 휘트콤은 한국 신사의 옷(허리띠를 묶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비행접시 챙이 달린 테이퍼링 연통모자를 쓰고)을 입고 나타나서 모금 활동을 했다.


1954년 퇴역한 위트컴 장군은 한국에 남았다. 마치 한국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돌아갈 조국과 고향이 있었음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전쟁고아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한묘숙 여사와 1963년 결혼해 전쟁고아 돕기와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전쟁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등의 수식어가 생겼다.  한국전쟁 중 북한의 장진호(長津湖) 전투에서 숨진 미군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마지막 임무로 여겼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미군 장군으로서 그가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이었다고 한다. 한 여사는 "위트컴 장군이 그런 약속을 한 이유가 있느냐"는 인터뷰 질문에 대해 "장군이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위트컴 장군은 전쟁으로 부하를 잃을 수 있지만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유달리 컸었지 않았나 싶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는 미군이나 한국군이나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전투일 것이다. 1950년 겨울 영하 40도가 넘는 혹한의 상황에서 미 해병대와 중공군 간에 벌어진 18일간의 전투다. 얼마나 추웠으면 총기가 얼어 작동이 불가할 정도였다. 미군에게 장진호는 미군 전쟁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후퇴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투보다는 후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얼마나 침착하게 사상사를 최소화시키면서 빠져나오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전투로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 장진호에 주둔했던 미 해병 제1사단 1만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10월 한국전 참전을 선언한 중공군은 11월 말 미 해병대의 압록강 진출을 막기 위해 장진호에 7개 사단 12만여 명을 투입했다. 그때 미군은 사상자를 데려오지 못하고 생존한 병사들만 탈출하기 급급했다(이상돈, 2014). 얼마나 처절했으면 전쟁 중인 1952년에 영화 <Retreat, Hell! >로 제작되었을까 싶다.


위트컴은 1982년 서거하기 전까지 사비를 들여 유해 송환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주로 부인 한 여사가 홍콩, 중국, 북한을 드나들면서 장진호 전투 사망자 유해를 송환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동안 100만 달러 이상의 사비를 썼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의 유해 송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한 여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북과 인접한 중국땅에서 탈북자나 조선족 상대로 미군 유해에서 나오는 도그택(군번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군번줄을 가져오면 하나에 1000달러, 혹은 500달러를 줬다. 그렇게 확보한 군번줄이 지금까지 300개가 넘는다. 그러나 진짜는 하나도 없다. 돈을 노리고 위조된 것들이다. 간혹 미군의 유해라며 뼈를 들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 역시 확인해 보면 소뼈다귀들이었다."(김남중, 2009). 물질에 눈이 멀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숭고한 뜻을 짓밟는 몰인간성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언젠가는 위트컴 부부의 노력이 결실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2022년은 한미수교 140주년이면서 위트컴 장군 서거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장군이 영면에 들어가신 지 사십 성상이 지나 많이 늦었지만 한국 정부와 한국인이 장군을 잊지 않고 그의 공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헌신과 희생을 높이 기리고 추모할 수 있어 다행이다.


위트컴 장군이 부산역전 대화재로 발생한 이재민들을 위해 군수창고를 열고 그들을 구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 제주의 김만덕을 떠올렸다. 거상 김만덕은 조선 정조대 제주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전 재산으로 육지의 곡식을 구매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군은 국가재산을 민간에 개방하였지만, 김만덕은 사유재산을 백성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들의 행동은 인도주의와 인류애라는 거창한 용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는 숭고한 인간미가 아닐 수 없다. 1840년 제주에 유배 중이었던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자 김종주(金鍾周)에게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졌다’라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다. 추사의 은광연세는 대한민국 정부가 리처드 S. 위트컴 장군에게 추서한 무궁화훈장에 다름아니다 할 것인다.  



염철현. (2022). 인문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박영스토리.

국가보훈처. (2022). 대한민국정책브리핑. 고 리차드 위트컴 장군,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1월 8일.

김남중. (2009). 국민일보. 인터뷰 In&Out] 위트컴희망재단 한묘숙 이사장. 7월 16일.

김태훈. (2022). 조선일보. [만물상] ‘파란 눈의 聖者’ 위트컴 장군. 11월 17일.

오상준. (2022). 국제신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위트컴 장군] <8> 장군의 유언. 11월 20일.

오상준. (2022). 국제신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위트컴 장군] <4> 한복 차림으로 시내 활보한 이유는. 11월 16일.

재한유엔기념공원 https://www.unmck.or.kr/kor/main/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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