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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17. 2023

직업 선택의 기준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 십계명

1990년대 초 저자는 경상남도 거창에 소재하는 거창고등학교(줄임말 '거고')를 방문했다. 50년대에 세운 사립 남녀공학의 기숙사형 고등학교다. 흥미로운 점은 학교와 외부를 구분하는 교문이나 담벼락도 없고 하물며 문패도 없었다. 지금이야 교문은 놔두고 담벼락을 철거하여 외부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한 학교들이 많지만, 그때에는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학교의 시설을 외부에 개방하고 학교밖과 연결 짓는 일은 단순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교육철학과 투명한 학교경영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표현이다. 거고에 교문과 담벼락이 없는 것은 오랜 시간 교육철학으로 자리 잡은 '자유와 자율'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학교가 지향하는 자유와 자율의 교육철학은 학생들의 학교생활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거고의 교육관은 '잘 놀아야 공부도 잘 한다'이다. 함박눈이 처음 내리는 날이면 "운동장에 모이라"는 교내방송에 따라 수업 중인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교실을 뛰어나온다. 토끼몰이를 하러 600m 정상의 학교 뒷산을 오른다. 학교가 선도적으로 10대 특유의 감성을 발산하게끔 한다. 매년 1박 2일로 인근 덕유산이나 지리산으로 야영을 간다. 감성이 왕성한 청년들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산중에 텐트를 치고 한밤중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면서 대자연의 신비를 노래한다. 예술제, 체육제, 연극 합창제, 소풍, 바자회 등 다양한 자치활동을 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시행한다. 학교와 교사는 학생들의 계획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거고는 어떻게 운영될까 싶다. 학교운영은 재단법인 거창고등학교회이다. 흔히 사용하는 학교법인 oo 학원이라는 이름도 쓰지 않는다. 법적 주인인 이사회는 학교의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을 구현하는 데 적합한 사람을 교장으로 임명한다. 이사회는 교장은 학교운영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며 교사 채용도 교장에게 일임한다. 교사들의 교무회의는 학사일정, 학급운영, 교과서선택, 교수방식, 평가, 학생지도 등 교육행위에 대한 자율권을 가진다. 교사는 교육전문가라는 확고한 신념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교육행사의 자율권을 준다. 이사회, 교장, 교사, 학생회 간의 권한위임(empowerment)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런 일이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모든 사립학교에서 가능할까? 거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거고는 우리나라 교육생태계에서 주목을 받은 지 오래다. 대도시의 명문학교를 제치고 서울에서 200km 밖에 있는 지방 소재의 사립학교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졸업생의 몇 % 이상이 대학에 진학했다거나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는 진부하다. 거고가 추구하는 교육철학과 교육방식 때문일 것이다. 거창고등학교는 학교의 존재 이유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인격교육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지식보다 인성이 먼저다. 거고가 추구하는 인재상은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 내듯 틀에 박히고 정형화된 인재를 거부하고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인격자를 원한다. 졸업생들이 우리 사회 맨 밑바닥에서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하기 원한다. 

 

거고만의 두 가지 관점 포인트가 있다. 첫째, 거고에는 '직업 선택 십계명'이 있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Ten Commandments)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거창고등학교가 파산하기 직전 제3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오늘의 거창고등학교의 교육철학과 교육방식을 뿌리내리게 한 전영창 교장의 평소 설교와 훈화를 그의 사후에 제5대 교장 도재원 선생님과 그의 아들이자 제4, 6대 교장을 지낸 전성은 이사장이 계명 형태로 정리해 만든 것이다. 전 이사장은 직업 선택 십계명을 만든 취지를 이렇게 말한다. '내 욕심대로 복 받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헌신하고 섬기고, 십자가를 지는 게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라는 아버지 전영창의 가르침대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예배식으로 진행되는 입학식을 지켜보던 학부모가 강당 뒤에 붙은 십계명을 읽고는 큰 소리로 아들 이름을 부르며 ‘이런 예수쟁이 학교엔 우리 아이 못 보내겠다’라고 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조현, 2020).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십계명을 들여다보자.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말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저자와 같은 세속적인 사람이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 십계명을 읽다 보면 모골(毛骨)이 송연(悚然) 해지는 느낌이 든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직업 선택의 기준과는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졌다. 일반 사람들의 가치 기준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거고 졸업생이라고 해도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계명은 아닐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항목이 대부분이다. 누가 월급도 적고 장래성도 없는 변방의 황무지로 직장을 얻어 가겠는가. 누가 사회적 존경은커녕 그것도 단두대가 기다리는 직장을 잡으려고 하겠는가. 철저히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계명일 것이다. 로마 당국의 핍박을 당하며 전도 활동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던 바울을 연상시킬 정도다. 


거고 졸업생에게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으로 제시한 십계명은 세간의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고의 제3대 교장을 역임하고 오늘날 거고의 교육철학을 뿌리내리게 한 전영창 교장(1917~1976)이 걸어왔던 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전 교장은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귀국 후에는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청소년들을 바르게 교육해야 희망이 있다’는 소신에 따라 재정 문제로 폐교 위기에 놓인 두메산골의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거창고등학교는 원래 호주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중 기독교계의 뜻있는 인사들이 인수했다가 재정 파탄에 이르렀다.) 교장부터 직업 선택의 십계명에 부합하는 자리를 찾아 직업을 선택했다. 학교가 졸업생을 변방의 황무지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리더부터 스스로 직업 선택 십계명을 실천했다. 오늘날 거고 졸업생의 직업 선택 십계명은 전영창 교장이 솔선수범하여 실천에 옮겼던 행동 그대로다.


거고의 직업 선택을 위한 십계명이 계명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질만능의 경쟁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가치를 부여할 항목이 있다.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할 때 생각하는 조건으로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직장'에 가고 싶은 것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직장의 미래를 더 멀리 내다보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보다는 도전적인 가치 기준을 세운다면, 월급이 적고 승진 조건도 없는 황무지의 변방이지만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직장이라면 갈 수 있을 것이다. 더 차분하게 깊이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 십계명이 결코 허황된 기준이 아니다. 거고 졸업생 중에는 성공하고 돈 많이 번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만 이익 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곤 어느 순간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과감히 자신을 던진다(장일현, 2015). 직업 선택 십계명이 졸업생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스톱' 버튼을 작동한 것이다. 인간에게 잠재적 교육이 중요한 이유를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거고 졸업생에게서 본다.


거고의 두 번째 관점 포인트는 학교가 원하는 교사상이다. 어떤 교사가 거고에 근무하고, 어떤 교사가 직업 선택 십계명을 실천할 거고인을 키우는가가 궁금하다. 거고에서 요구하는 교사상은 다음과 같다.  


o 교직을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천직으로 여기는 선생님

o 헌신과 사랑을 실천하는 선생님

o 학생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

o 학생들을 위해서 개인적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을 수 있는 선생님


거고에서 교사에게 요구하는 교사상은 교사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거고의 교사들은 이 덕목들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실천하고 있다. 저자가 우리나라 고등학교 중에서 명문고라고 평판이 자자한 몇 군데 학교의 홈페이지를 찾아 학교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교사상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떤 학생을 길러내겠다는 학생상 또는 인재상은 있지만, 학교에서 요구하는 교사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사상은 학교의 건학이념과 연결되고, 학교가 어떤 인재를 키우겠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된다. 


거고의 교사상에 부합한 교사들은 아이들이 야자를 할 때 교사들도 교무실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거나 모의고사 결과를 분석한다.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들이 만들어준 보충 교재로 공부한다. 학생들은 야자 시간에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교무실에서 기다리는 교사를 찾아가 묻고 답을 얻는다. 학생이 행복한 것이 곧 교사 자신이 행복하고, 교사를 직업이 아닌 천직으로 생각하는 거고의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시간과 자원을 쏟아 부는다. 학생의 학업 신장과 인성 함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교사의 헌신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니 거고에는 '사교육이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 교육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부모 10명 중 4명은 ‘자녀가 공부를 안 하고 있으면 불안’(40.8%)하고, 아이가 학원에 가거나 과외 공부를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36.7%)고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심지어 학부모 40.5%는 ‘자녀가 스스로 공부할 수 있어도 사교육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학부모에게 사교육은 불안증세 완화제다. 자녀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자녀가 자기주도학습을 할 능력이 있어도 사교육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교육을 줄이는 노력은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학부모들을 사교육으로 몰아가는 동력은 불안감이기 때문에 이를 줄여주려면 학교에서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라거나 “초·중·고교 모두 질은 높고 비용은 저렴한 양질의 방과 후 수업 등을 운영해서 학교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를 높여야 한다”라고 말한다(김연주, 2022). 핵심은 학교에서 양질의 우수한 교육을 제공하여 학교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를 높여야 한다는 말이다. 전문가들의 말은 조사결과  이후 매번 되풀이되지만 공염불이 되고 만다. 사교육 없는 거고의 힘은 바로 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가능하다. 거창고등학교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배움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린다. 거고에서 '교육의 수준은 교사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은 평범한 말에 불과하다. 


거고에서는 졸업생이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십계명을 별도의 시간을 들여 가르치지 않는다. 십계명은 원칙이거나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거창고등학교가 지향하는 (특별한) 교육철학이지만 실천은 졸업생 각자에게 달려 있다. 학생들이 평생 간직하고 싶은 가치와 신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담는다. 무엇보다 학창 시절 학생들이 몸과 가슴으로 느끼는 가치와 신념은 교사와 교장 등 학교 구성원이 솔선수범하여 실천하는 것을 보고 강화될 뿐이다. 옛말에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다"라는 말과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라는 말이 맞다. '인성교육진흥법'(2020년)이 제정되어 시행 중이다. 인성은 지식처럼 가르쳐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며, 설계 도면을 따라 건축물을 짓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람의 인성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다. 사회 어른이 온갖 나쁜 짓은 다하면서 배우는 어린아이들에게 올바른 인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은 물이 역류하는 것이다. 


거창고등학교를 통해 우리 교육의 희망을 본다고 하면 우리 교육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것일까. 거창고등학교의 교사를 통해 우리 교육의 희망과 비전은 교육주체, 즉 학부모, 학생, 교사, 교육당국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는 교육철학도 중요하고 탄탄한 재정도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공교육이 짊어져야 할 몫을 사교육에 전가시키면서 '공교육의 위기'를 운운하는 우리 교육계의 대오각성이 필요한 이유다. 누가 거창고등학교를 지방 소도시의 대안학교라고 하는가. 거고는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대안들 중 하나에 해당하는 학교가  아니라 교육이 나아가야 할 본질과 방향을 밝히는 등대다. 




김연주. (2022). 조선일보. “그래도 학원 보내야”… 더 커진 사교육 의존증. 1월 18일.

김진호. (2017). 경남일보. [가고파] 거창고 직업선택 10계명. 2월 2일. 

박형숙. (2015). "우린 안 하는 걸 잘한다", 놀면서 성공한 학교. 7월 20일.

장일현. (2015). 조선일보. [Why] 3년간 거창高 졸업생 인터뷰… '직업의 十誡(십계)' 깨달은 어머니. 2월 7일.

정해숙. (2011). 한겨레. [길을찾아서] “학교 문닫아도 학생지킨다” 희망 보여준 경남 거창고. 7월 10일. 

조   현. (2020). 한겨레. 전성은 거창고 이사장 “도그마로부터 독립하라”. 10월 28일.

거창고등학교 https://geochang-h.gne.go.kr/geochang-h/main.do

디지털무주대전. <전영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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