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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29. 2023

한국과 피를 나눈 형제, 튀르키예

역사 교육의 힘

2002년 FIFA 월드컵 대회기간 내내 우리나라의 거리와 광장은 '붉은 악마'의 물결로 뒤덮었다. 우리나라 축구팀은 최종 4위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의 힘과 홈팀의 이점을 직접 경험했다. 우리나라는 3, 4위전에서는 튀르키예(그때 이름은 '터키')와의 경기에서 져 4위를 차지했다. 응원단의 플래카드에 '우리는 친구'라는 이색적인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국가와의 경기를 치를 때와는 다르게 튀르키예와의 경기는 마치 친구끼리의 시합을 연상케 했다. 누가 지고 이기는 것은 나중 문제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2023년 2월 튀르키예에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사가 발생하고 천문학적인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우리가 공산 침략을 받았을 때 지체 없이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서 우리의 자유를 지켜준 형제의 나라가 바로 튀르키예였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정부 역시 지체 없이 정부 차원 구호단을 급파하고 긴급 의약품을 지원했다. 민간차원에서도 튀르키예 국민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현재는 이재민을 위한 임시 거주지를 짓고 있다. 우리나라는 튀르키예가 국가적 재난을 겪고 있을 때 진정한 친구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인디언 속담에도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하지 않던가.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즉 모딘 바람에도 꺾이지 않은 강한 풀을 알아 볼 수 있듯이 위험한 처지를 닥쳐봐야 관계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튀르키예와는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튀르키예는 비행기로 12시간을 타야 갈 수 있는 지리적으로도 먼 곳이다. 우리나라와 튀르키예의 관계를 보면 국가 간의 관계는 지리적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나라지만 정서적으로는 얼마나 먼 나라인가.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간의 관계 역시 지리적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달려있지 않고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고 어떤 인연을 맺어왔는가가 더 중요할 성싶다. 우리나라와 튀르키예가 어떤 역사적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와 튀르키예 양국 간 인연의 뿌리는 2천 년 전까지 뻗어 있으며, 교류도 활발했다고 추측한다. 고구려는 튀르키예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함께 중국에 맞섰다. 두 나라는 조문 사절을 교환하며 우방으로 지냈다. 튀르키예 역사 교과서는 튀르크와 고구려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튀르키예인의 조상 돌궐(突厥, 튀르키예와 전신인 오스만튀르크를 세운 투르크족의 한자 음차표기)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중국 역사서 구당서(舊唐書)는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민이 당나라와 돌궐 등에 유입됐다고 기록했다(정하종, 2017).


중국 수나라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도 고구려와 튀르크 사이의 모종의 밀약을 걱정했다고 한다. 고구려와 튀르크는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 수나라는 마음 놓고 고구려를 공격할 수 없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 튀르크의 방계인 위구르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다.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렀다. 조선 세종은 코란 낭송을 즐겨 이를 '회회 조회'로 정례화했다고 한다. 조선이 유교 폐쇄 국가로 가면서 두 민족은 멀어졌지만,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약 1만 5000명 튀르키예 청년들이 옛 형제국을 찾아와 피를 바쳤다(양상훈, 2020). 튀르키예는 4차에 걸쳐 22,006명을 파병했는데, 724명이 전사하고 166명이 실종됐다. 파병 규모로는 유엔군 가운데 네 번째이고, 전사자가 두 번째로 많다 보니 '피로 맺은 형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도 하다(국가기록원).    


6.25 전쟁 소식을 접한 튀르키예에서는 고교생들이 전쟁이 일어난 형제의 나라에 왜 지원군을 보내지 않느냐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튀르키예 정부가 지원병을 모집하자 순식간에 파병인원을 넘어섰다. 왜 터키 젊은이들은 머나먼 이국 땅 전쟁에 앞 다투어 지원했을까. 그들은 한국이 '피로 맺은 형제'의 나라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역사교과서는 6~7세기 몽골 일대에서 크게 번성했던 그들의 조상 돌궐과 고구려와의 관계, 그리고 돌궐제국이 당나라에 패망한 이후 현대의 튀르키예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국가기록원).


6.25 전쟁에서 튀르키예군이 중공군과 싸웠던 사건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돌궐은 중국 북방에서 중국과 싸우며 세력다툼을 벌였는데, 돌궐의 후손인 튀르키예 병사들이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다시 전쟁을 치른 것을 보면서 되풀이되는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절대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우리나라와 튀르키예는 1957년 수교를 맺고 형제국 간의 우호와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구려와 돌궐의 우호 관계가 대한민국과 튀르키예의 수교로 재현되었다. 개인이나 국가나 그 관계가 좋다 보면 서로를 위해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 한다. 튀르키예의 앙카라에는 한국공원이 있다. 서울시에서 1973년 11월 튀르키예공화국 수립 50주년에 맞춰 한국공원을 조성하고 앙카라시에 헌정했다.  6.25 전쟁 당시 유엔 산하 16개국이 군대를 파병했는데, 파병국에 공원을 조성하여 헌정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한국공원에는 우리나라 태극기와 튀르키예 국기가 나란히 걸려 양국의 우호와 친선을 상징하고 있다. 참전 기념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본떴다고 하는데 아래 제단엔 부산 유엔공원 튀르키예군 묘역(462명 안장)에서 퍼 온 흙이 담겨 있었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는 튀르키예 공원이 있다. 1977년 서울시가 조성하여 개원했다. 앙카라의 한국공원과 서울의 튀르키예 공원은 우애 좋은 형제가 부모가 남긴 유산을 사이좋게 나눠갖는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상징물이다.


튀르키예 군인과 우리나라 전쟁고아를 다룬 영화 '아일라'도 특별한 감동을 선사했다. 우리나라와 튀르키예의 합작영화다. 튀르키예 국민 5백만명이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 '아일라'는 6.25 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군인 슐레이만 딜빌리이 하사와 전쟁고아가 된 아이의 실제 이야기다. 슐레이만은 평안남도 군우리에서북한군의 폭격에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해 부대로 데려왔다. 그는 전쟁고아가 된 네 살배기 어린아이를 '아일라'(Ayla)로 불렀는데, 아일라 아이의 얼굴이 달처럼 둥글고 달빛 아래에서 발견했다는 이유로 '달의 후광'을 뜻하는 튀르키예어다. 파병기간이 끝나고 튀르키예로 귀환해야만 하는 슐레이만은 아일라를 튀르키예로 데리고 가기 위해 몰래 큰 가방에 아이를 넣고 가다 들켜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슐레이만은 튀르키예군이 경기 수원에 지은 '앙카라 학원' 보육원에 맡기고 귀국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일라의 아빠가 된 슐레이만은 꼭 찾으러 온다는 약속을 하고 귀국하지만 상봉하기까지는 47년이 더 필요했다. 한국전쟁 다큐를 제작 중인 방송사의 도움으로 아일라의 행방을 알게 됐고 할머니가 된 그녀와 재회하는 데 성공한다. 6.25 전쟁에 참전한 군인 혹은 우리나라 주둔군과 인연이 된 사례가 종종 알려져 인간승리의 감동을 주는 소식을 들었지만 튀르키예 참전 군인과 우리나라 전쟁고아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처음인 것 같다.


한편 튀르키예가 6.25 전쟁에 많은 군인을 지체 없이 파병한 이유 중 하나는 서방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NATO 회원국이 되고자 하는 전략적 계산도 깔려있었다.  튀르키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도래하면서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서방에 편입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했다. 1952년 2월 튀르키예는 서방으로부터 한국전쟁 참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NATO에 가입을 승인받았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에 파병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숙원이었던 NATO에도 가입하면서 일석이조의 파병 효과를 달성했다. 


파병도 국익을 위한 외교전략이다. 우리나라도  베트남전에 많은 병사를 파병하였고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우리나라 정부가 베트남전에 파병을 결정하게 된 원인에는 미국에 대한 보은, 미국의 강압, 한국안보를 위한 대체 파병, 정치적, 경제적 이해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깔려있다. 우리나라는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안보적,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적 노력을 하였고, 그 효과가 박정희 정부의 권력 강화와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이한우, 2006). 현재 우리나라는 유엔평화유지군(PKO)으로 주둔하고 있다. 2007년 7월부터 유엔평화유지군 동명 부대를 레바논에 파병하여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으며, 남수단에는 2013년부터 재건지원단을 파병하고 있다.


튀르키예의 우리나라 사랑은 유별난 것 같다. 88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때 튀르키예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형제의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라고 하면서 종일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도 튀르키예는 변함없이 우리나라를 지지하고 있다.


튀르키예인들이 우리나라를 '칸 카르데시', 즉 피를 나눈 형제라고 부르는 근원을 생각해 본다. 그 근원은 역사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튀르키예인들은 역사교과서에서 오래전부터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나라와 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배우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6.25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튀르키예 정부에 왜 파병을 서두르지 않고 꾸물거리냐고 시위를 했던 이유다. 국민 개개인이 과거 또는 현재 어떤 역사교육을 받았거나 또는 받고 있느냐는 곧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우애 좋은 형제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강 건너 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와 우리나라와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 조작하는 이웃 국가 일본의 파렴치하고 뻔뻔한 행동에 치를 떠는 것은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한일 간의 미래가 두렵고 왜곡, 조작된 역사교과서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일본 청소년들이 미래에 어떤 역사관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은 보편적 사고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편향적이고 차별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와 튀르키예가 '피를 나눈 형제'로 발전시켜 온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 역사를 악착같이 기억하고 지켜내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한우. (2006). "한국이 보는 베트남전쟁: 쟁점과 논의". 동아연구 51호.

김석동. (2021). 인사이트코리아. 고구려 왕가 후예가 터키 제국의 뿌리. 2월 1일.

서현. (2023). 중앙일보. 아야소피아와 초승달. 3월 2일.

양상훈. (2020). 조선일보. 우리 대통령이 "칸 카르데시!" 할 차례. 8월 20일.

정하종. (2017). 연합뉴스. [아나톨리아 연대기④] 중국을 떨게 한 고구려·돌궐 연대. 7월 30일.

코레 아일라. (2010). MBC 다큐멘터리.

아일라. (2017). 영화.

국가기록원. 동양의 양 끝, 한 - 터키 왜 형제의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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