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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25. 2023

생명을 예단하지 마라

진리는 겉에 있지 않다

농촌에서는 2월 하순부터 농번기에 들어선다. 농기계의 다양한 엔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람 대신 기계의 힘을 빌어 퇴비를 나르고 흙을 갈아엎고 로터리를 쳐 파종 준비를 한다. 토질을 기름지게 할 퇴비도 고랑에 줄 세워져 놓여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도화된 농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는 초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고사리 같은 어린아이의 손조차도 귀한 곳이 농촌이다. 농사는 곧 타이밍의 예술이고 과학이기 때문이다.  


땅 위에서는 사람과 기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못지않게 땅 아래 식물들은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비라도 내리면 새싹이 쑥쑥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이 농촌 봄의 전경이다.광주리를 든 아낙네가 어린잎을 채취하는 모습도 하나둘 눈에 띈다. 용써가며 땅힘을 밀어내고 세상에 얼굴을 내민 새싹을 보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 장사가 따로 있을까 싶다.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땅 위에 떨어지는 씨앗 중 5% 미만의 씨앗이 싹을 틔운다고 한다. 생존 확률이 낮은 씨앗이 싹을 틔운다는 것은 경이롭고 위대하다. 대자연의 생명력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경외감마저 든다.


매일 이구동성으로 들어오는 꽃축제 소식을 접하고 집 밖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보지만 그 아름다움을 집안에서도 느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선배의 정원에서 수십 그루의 수선화가져왔다. 수선화는 바다에서 뭍으로 막 올라온 활어처럼 싱싱했다. 하나의 구근이 여러 자손을 거느리며 탄탄한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웬만큼의 힘으로는 구근을 나눠 옮겨심기가 쉽지 않았다. 수선화를 구경만 했지 구근과 꽃대를 만지며 심는 즐거움과 행복감은 특별했다. 짙은 노랑과 옅은 흰색이 조화를 이룬 수선화는  보는 사람을 나르시스트로 만들기에 충분한 매력을 발산했다.


아예 섬을 수선화로 치장한 지역도 있다. 전남 신안군 선도(蟬島), 섬이 매미 모양을 닮았다고 매미 '선'을 썼다. 180만 구에 가까운 황금빛 수선화가 자연풍광과 어우러진다. 신안군은 선도에 약 8ha 규모의 수선화 꽃밭을 조성하고 '수선화 섬'으로 명명했다. '수선화 여인' 현복순 할머니가 집 앞에 심기 시작한 수선화가 군(郡)을 대표하는 관광브랜드가 되었다. 선도의 지붕은 수선화를 닮은 노란 색이다. 신안은 컬러 마케팅의 원조다.


수선화에 대한 시와 노래는 다른 꽃보다 더 많은 듯 하다.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미청년(美靑年)이 수선화가 되었다는 전설때문일 것이다. 이해인 수녀는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이라고 수선화의 자태를 표현했고, 나태주는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高臺廣室) 등 뜨신 안방이었드란 말이냐!"고 하면서 수선화의 강인한 생명력을 시로 표현했다. 정호승은 수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고 하면서 수선화에 얽힌 외로운 자기애를 인간이 가진 숙명으로 보았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있기에 슬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 시인 로버트 헤릭(Robert Herrick)은 "어여쁜 수선화야/ 그처럼 빨리 떠나는/ 네 모습 보니 눈물이 나는구나/ 아침 해 비록 일찍 떠올랐으나/ 아직 중천에 이르지 못했거늘/ 가지 마라, 가지 마"고 하면서 덧없는 인생을 수선화에 비유하기도 했다.


넉넉하지 않은 시골 정원의 빈터를 찾아 땅을 파는 중 이제 막 싹을 틔운 백합 구근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백합의 줄기가 말라 있어 죽은 줄만 알았다. 아뿔싸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보고 땅을 팔 걸...


나보다 정원을 가꾼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봄철에 함부로 땅을 파거나 밟지 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풀도 뽑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 의미를 건성으로 들었다. 눈으로 확인하면 새싹과 잡풀을 구분할 수 있고 지난해에 심었던 꽃의 위치를 기억할 줄 알았다. 지나친 자기 교만이었다. 정원 선배들이 들여준 말의 의미를 구근에 상처를 내고서야 깨달았다. 곤란한 상황을 당한 뒤에 알게 되는 곤이지(困而知)다. 정원은 생명체의 집합소다. 내 땅이라고 하여 내 마음대로 삽질을 하거나 호미질을 해서는 안된다. 땅속의 생명들에게 물어볼 수 없다면 기다림과 느림의 철학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겉에서 보는 생명과 속 안에 있는 생명이 다르다. 진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봄에 이 깨달음만 간직해도 큰 수확이다.


수선화에 눈이 팔려 논점이 빗나갈 뻔 했다. 여하튼 봄에 이제 막 땅 위로 쏘아 오른 어린 새싹들을 보면 어떤 작물인지 어떤 꽃인지 도대체 분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잡풀인지 꽃대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형태가 잡히고 윤곽이 드러나고서야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식물의 새싹은 우리 사람에겐 어린이에 해당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그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미래를 예단하곤 한다. 어른이 마치 무당처럼 누군가의 미래를 예측하는 교만를 부리는 것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아이의 앞날을 잘 알 수 없다. 지식과 경험으로 예측을 내놓을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고 지식 자랑을 하고픈 욕심이다. 대기만성형(late bloomer)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의 위대성은 생태시계에 따라 꽃을 피는 꽃과 다르게 언제 만개할 줄 모르는 불가사의한 면에 있지 않을까. 인생의 봄은 언제든 가능하고 누구든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을 다 키운 다음에 든 생각이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기다려주는 것이다. 젊을 적에 이런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아이들을 더 잘 키웠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갖는다. 어린 새싹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아이들도 시간과 함께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나간다. 진리는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니 말이다. 백합 구근을 어루만져 다시 심어주었다. 보름쯤 후에 구근이 건강한 싹을 틔며 모습을 보여주며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걸어왔다. 생명 앞에 경이와 경외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가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생며을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주제넘은 자만이면 인간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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