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안암 캠퍼스의 정오는 색다른 기분이 들게 한다. 문과대학(서관) 시계탑에서 울려 퍼지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곡 때문이다. 시계탑은 고려대의 랜드마크다. 1961년 쌍용그룹회장 김성곤 교우가 일본과 미국 등에서 주문 제작해 본교에 기증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동학농민혁명(1894년)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일명 파랑새요)를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면서 나른했던 의식이 깨어나는 것 같다. 고려대는 시계탑에서 노래를 흘러 보내는 정책을 결정했고, 수많은 노래 중에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선정했다.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1910년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원을 인수한 이후부터 천도교('동학'의 다른 이름) 교단의 영향을 받았고,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정신을 기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손병희는 동학(東學)의 3대 교주를 역임했고,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를 우리나라의 신흥 종교로 전환한 인물이다. 3.1운동의 33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천도교에 관해 한 마디 더 하자. 천도교에서는 신자를 교인이라 칭하고 교인끼리는 서로를 동덕(同德)이라 부른다. 동덕여중, 동덕여교, 동덕여대는 천도교의 미션스쿨로 출발하였다.
혹자들이 고려대를 왜 '민족대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4.18 의거 등에서 보듯이 고려대가 불의에 항거하는 학교 전통을 갖게 된 것도 학창 시절 심취된 민족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부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시위, 항거할 때 <파랑새요>는 시위 학생들에게 특별한 위로와 힘이 되었다.
조류 중에 왜 파랑새를 등장시켰을까? 파랑새는 여름 철새로 동화, 시가,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데 '행복'과 '기쁨'을 상징한다. 소셜 미디어 기업 트위터(Twitter)도 회사 로고가 파랑새였다. 파랑새처럼 행복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고자 하는 포부를 담았을 것이다. 지금은 알파벳 'X'로 바꿨다.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고 나서 일어난 일이지만 파랑새가 사라진 트위터는 사용하기가 꺼려진다. 동양과 서양의 상징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가 달라서일까. 서양에서 알파벳 'X'는 체크리스트에 자신의 생각을 표기할 때나 학교에서 시험지에 정답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부호로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에서 '엑스(X)'는 '그 사람 또는 그 물건 아니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인간관계에서도 '그 사람 엑스야'라고 말하면 관계가 끝났다는 뜻이다. 트위터의 로고가 바뀐 뒤에 수요자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랑새는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강원도 동해안 낙산사와 관련된다. 낙산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로 관동팔경 중 한 곳이다. 낙산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을 직접 눈으로 보기(親見) 위해 이곳에 도착하여 파랑새를 만났는데, 파랑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紅蓮)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나타난 관음보살을 직접 보았다. 대사는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 이름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이라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파랑새는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 새다. 파랑새를 행복과 기쁨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 독식은 없는 법이다. 민담설화에서는 파랑새를 사악한 요괴인 여우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전부터 널리 알려진 순수 민요라는 주장이 있다. 예로부터 호남평야의 일대인 전북 부안, 김제, 정읍에서는 가뭄으로 모내기를 하지 못하면 논에 녹두를 심었다. 대파(代播), 대체작물을 파종하였다. 이 녹두로 청포를 만들어 먹는데, 녹두가 익을 때쯤이면 새들이 날아와서 열매를 따먹는다. 이때 처녀들이 새를 보면서 부른 노래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고 한다. 새타령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파랑새, 녹두꽃, 청포장수에 대한 의문은 해소된다. 어떻게 <파랑새요>가 동학농민혁명의 주제가가 되었을까? 그리고 녹두꽃이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상징하고 후에 녹두장군이 되었을까?
어릴 적 전봉준은 키가 매우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녹두에 비유했다. 녹두꽃의 꽃말은 '강인함'과 '단단함'을 상징한다. 녹두를 만져보면 바윗돌처럼 강하고 단단하다. 녹두의 전분으로 만든 묵을 청포(淸泡)라고 한다. 그 강인함과 단단함이 음식으로 바뀌고 우리 몸에서는 해독 작용을 한다. 녹두의 외형적인 특성을 인물에 빗댄 우리 조상들의 비유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빼어나다. 뛰어난 인문학적인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파랑새가 팔왕새로도 발음이 되고, 우연히도 한자 팔왕(八王)이 전봉준의 전(全)이 되니 동학군에 차용되었다는 주장이다. <파랑새요>는 전봉준이 위급에 처하게 되면서 변용되어 재탄생하게 된다(최래옥, 1986). 백성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번곡(飜曲), 즉 참요(讖謠)를 만든다. 두 곡의 번곡을 소개해보자.
1.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달아나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봄철인 줄 알지 마라
백설분분 휘날리면
먹을 것이 없어진다.
2.
아랫녘 새야 웃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두류박 딱딱우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번곡을 보면 백성들이 국내 정세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그 상황을 돌파할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백성은 늘 위대하다. 새는 민중을 가리키며 두류박은 전주 고부에 있는 두류산(頭流山)을 말한다. '딱딱우여'는 날아가라 또는 해산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거사를 일으켰지만 아직 때가 아니며 그에게 위험이 닦쳤으니 빨리 도망가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1894-1895)의 원인, 경과, 결과 등에 대해서는 수많은 교과서, 문헌 등에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핵심은 동학(東學)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교도의 지도하에 무능한 정부, 부패한 관료를 응징하고 외세를 배척하고자 하는 농민항거였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동학농민혁명은 다른 민란과는 결이 다른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동학농민군은 1895년 5월, 호남 각지에서 온 민중이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에 모여 혁명군으로서 조직을 갖추고 창의문을 발표한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 뜻이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을 것이니,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라고 했다.
동아시아 3국(한국, 중국, 일본) 중 우리나라에서 민중항쟁이 활발했던 이유를 인구수에 비해 많은 교육기관과 백성들의 교육열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유교철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18세기에 600여 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인구 대비 서원의 밀도가 같은 시기 중국에 비해 10배 이상이었다. 서당 수도 인구수에 비해 많았는데, 1860년대 전라도 임자도와 지도에는 각각 10여 개의 서당이 있을 정도였다. 최말단의 행정단위까지 설립된 교육기관과 한글과 같은 쉬운 문자 덕분에 소통이 원활할 수 있었고 백성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이나미, 2018).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디지털혁명을 선도하게 된 것도 우연히 아니다. 우리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쉬운 한글이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계승되어 살아 숨 쉰다.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한 이른바 '촛불혁명' 때 우리 국민은 '이게 나라야?'라는 피켓을 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들은 피켓 대신에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이게 나라야?'라고 항거했다. 그렇게 모인 농민들이 많게는 이십만 명이 넘었다.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 즉 농민군이 '서면 흰옷으로 온산이 덮이고, 앉으면 죽창이 산을 덮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수십 수백만 명이 운집한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 때 수십 수백만 명이 운집한 서울 한복판의 광화문 그리고 시청 광장은 전라도 '고부(古阜)'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백성들이 입은 옷이 다르고 손에 든 도구가 달랐을 뿐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왕조시대의 동학농민혁명이나 민주시대의 '촛불혁명'은 '군주민수'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백성은 행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파랑새를 기다리며 인내하지만 무한정은 아니다. 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뿌리인가를 되돌아본다.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우리나라만의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넘어 자유, 평등, 인권, 정의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고양하고 세계사적으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2023년 5월 동학농민혁명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숭고하고 보편적인 가치는 언제가 인정을 받는 법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교훈을 더 소중하게 계승, 발전시키면 좋겠다.
이나미. (2018).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로서의 ‘민란’. 한국민주주의 연구소. 28호.
이찬욱. (2008). 고전문학에 나타난 '파랑새(靑鳥)'의 문화원형 상징성 연구. 우리 문학연구, 25권.
임상욱. (2021). 동학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 미친 서학의 영향 : 동학의 성장과 몰락. 동양학회, 59권.
조광. (2003). 19세기 후반 서학과 동학의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 동양학회, 16권.
최래옥. (1986). 개화기 구비문학 연구. 한국학논집, 9권.
권병유. (2019). 고대신문. 지나쳐온 캠퍼스 공간, 생생한 역사의 산증인. 5월 8일.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녹두꽃. 여름 52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https://1894.or.kr/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