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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02. 2023

계영배(戒盈杯)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인간의 끝도 없는 욕심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소작농 바흠은 오직 땅을 소유하여 자기 땅에 농사짓는 것이 소원이었다. 열심히 돈을 모으던 그는 어떤 마을에 가면 싼값에 넓은 땅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은 돈 전부를 털어서 가족과 함께 찾아간다. 1000 루블을 내고 해 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 걸어서 돌아온 땅 모두를 가질 수 있다는 조건에 계약을 한다. 다만, 해질 무렵까지 출발점에 돌아오지 못하면 땅을 조금도 가질 수 없다. 그는 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쉬지도, 먹지도 않고 달리기만 하다가, 문득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서둘러 돌아오지만 해가 진다. 죽을 힘을 다해서 해가 짐과 동시에 도착해서 많은 땅을 갖게 되는가 했지만, 무리한 체력소모로 그만 피를 토하며 죽게 되고 그 자리에서 땅에 묻히게 되니 결국 2m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 그가 차지한 땅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인간이 죽어 묻히는 땅은 고작 2m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늘에서 황금비를 내린다 해도 욕망을 다 채울 수 없다”라고 한다. 술만 해도 그렇다. 술과 마주하면 '적당히', '알맞게'라는 말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적당히 마시면 기분도 좋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다. 시인 조지훈은 마치 바둑의 단(段)처럼 술에도 등급을 구분했다. 주도유단(酒道有段), 즉 주도(酒道)에도 단이 있다. 그의 흥미로운 구분에는 폐주(廢酒)가 나오는데 일명 열반주(涅槃酒)라고 한다.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늘 화를 부르는 법이다. 탈무드는 “올바른 자는 자기의 욕심을 조정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는 욕심에 조정당한다”라고 했다. 폐주는 사람이 술의 양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조정하게 놔두는 최악의 경우다.


인간은 욕을 경계하려고 하지만 선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계영배(戒盈杯)가 등장한다. 계영배는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계영배를 곁에 두고 마음을 다져 잡는다. 고대 중국에서는 계영배와 같은 잔을 '기기(欹器)'라고 했다. 군주가 올바로 처신하도록 경계하기 위하여 사용한 그릇이다. 한자 '기(欹)'는 '기운다'는 뜻으로,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지고, 비었을 때는 조금 기울어지며, 절반 정도 차면 반듯하게 놓이는 그릇이다. '넘치지도 부족하지 않게' 처신하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데 사용한 그릇이다. 과유불급과 중용(中庸)의 뜻과 상통한다. 사자성어로는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한다.


계영배는 보통 술잔과 달리 잔에 어느 정도 술이 채워지면 밑으로 모두 빠져나가게 만들어졌다. ‘과음을 경계하라’는 뜻과 함께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백자 계영배를 컴퓨터 단층촬영(CT) 한 결과, 잔 내부에 원통형 관(管)이 있었다. 정해진 양의 술을 따르면 대기압으로 인해 이 관을 타고 술이 스스로 빠져나가는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계영배는 술이 70%쯤 차면 밑으로 흘러내린다. 웬만한 사람도 스스로를 경계하는 그림이나 글을 족자로 만들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는 것이 다반사지만,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沃, 1779∼1855)은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과욕을 다스리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임상옥과 계영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임상옥이 남긴 어록이 '가포집'에 전해진다. ‘재상수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물이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뜻이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물의 이치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다. 고이면 썩는 법이다. 사람이 필요 이상의 재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그 재물은 악취를 풍기게 되고, 재물을 소유한 이도 썩게 만든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재물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흘러가야 한다. 재물은 물처럼 흘러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소유주가 은행예치나 금고와 같은 안전한 곳에 가둬 놓는다고 해도 언젠가 소유주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울은 속일 수 없다. 인간관계에서 사람 대하기를 저울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특히 거래 관계에서 정직과 신용은 저울과 같이 속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상도(商道)> 마지막 장면에서 임상옥은 "장사는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상인의 기본을 강조한다. 임상옥은 조선 최고의 부자이면서 계영배를 지니고 다니면서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경계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며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세금을 정확히 납부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후세에 본보기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전라도 화순 출신 실학자 하백원(河百源, 1781∼1844)과 강원도 홍천 출신 도공(陶工) 우명옥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화순은 저자의 고향이라 눈이 번쩍 띄었다. 하백원은 과학자·성리학자·실학자로 계영배를 비롯하여 양수기 역할을 하는 자승거(自升車), 펌프와 같이 물의 수압을 이용한 강흡기와 자명종 등을 만들었다. 하백원은 다산 정약용을 닮았다. 하백원은 다산처럼 이용후생(利用厚生), 즉 백성이 사용하는 기구 따위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衣食)을 풍부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고자 했다. 그들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를 가졌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에 경도된 조선은 과학자 선비를 곱게 보지 않았다. 선비가 괴이한 술수를 쓴다는 죄목을 달아 하백원을 귀양 보냈다. 성리학이 담는 그릇의 한계다.


우명옥은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우삼돌이다. 우명옥은 왕실의 진상품을 만들던 경기도 광주분원 도공으로 들어가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고 익혀 마침내 스승도 이루지 못한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어 명성을 얻은 인물로 전해진다. 청출어람이다. 왕실에서도 우명옥이 만든 자기에 반해 그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명문 세가에서는 우명옥의 자기를 소유하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길 정도였다. 이름도 삼돌에서 명옥으로 바꿔 지었다. 두메산골에서 질그릇을 구워 팔던 옹기장이에서 왕실의 도기를 만드는 장인으로 스타가 되었다. 부와 명성을 얻은 우명옥은 주색잡기로 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졸부의 막장 드라마다. 그는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잘못을 뉘우치고 스승에게 돌아왔다. 우명옥은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스승은 그런 그를 반갑게 맞아주고 다시 시작할 것을 권했다. 이젠 그릇이 아닌 너를 빚어보라고 했다. 우명옥은 언젠가 실학자 하백원에게 전해 들었던 방법대로 술잔 하나를 만들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밴 계영배의 탄생이다.


우명옥은 계영배를 들고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은 “무슨 잔이냐?”라고 물었다. “계영배라고 하옵니다.” “무슨 뜻이 담긴 잔이냐?”는 스승의 질문에 “지나침을 경계하는 잔입니다”라고 답했다. 계영배는 우명옥의 인생 전체를 담은 그릇이며, 속죄의 마음을 과학으로 빚어낸 명인의 작품이다. 최근 홍천에서는 우명옥의 계영배를 문화,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주먹을 편다. 이 세상과 이별할 때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이 없다. 돈을 산더미만큼 쌓아놓은 재벌이 묻히는 공간은 2m에 불과하다. 화장을 하면 차지하는 공간은 고작 50cm도 되지 않는다. 계영배는 소유하여 자랑하는 자기가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선 계영배를 보고 욕심이 지나치지 않은지 경계할 일이다. 뭐든 지나치면 탈이 나게 돼있다. 계영배는 7부 능선을 넘었을 때 바닥의 구멍으로 흘러버린다. 주량의 70%만 마시고, 하고 싶은 말의 70%만 말하고, 소유하고 싶은 물건의 70%만 소유하면서 계영(戒盈)의 정신을 실천하면 어떻까 싶다. 가포(稼圃) 임상옥은 "나를 낳은 건 부모지만, 나를 이루게 한 것은 하나의 잔이다"라고 말하면서 계영배의 가치를 부여했다(稼圃集).

 


최인호. (2020). 상도. 여백.

톨스토이, 레흐. (1886).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순영 옮김. 문예출판사.

권재혁. (2021). 강원도민일보. 홍천지역 전설 계영배 문화관광상품화 추진. 8월 24일.

김응구. (2023). CNB Journal. 우린 술잔에도 인생을 담았구나. 4월 11일.

조용헌. (2023).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돈의 맛. 11월 13일.

허윤희. (2020). 조선일보. 조선 거상 임상옥의 술잔, 그 잔엔 비밀의 구멍이 있었는데. 10월 13일.

드라마. ( <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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