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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03. 2023

리칸유(李光耀) 전(前) 총리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20세 후반, 정치경제적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됐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동아시아의 네 국가, 즉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시아 네 개 국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연구기관과 학자들은 아시아 4개국의 경제성장 요인을 유교적 가치에서 찾고 유교자본주의(Confucian Capitalis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서양 자본주의와는 달리, 유교사상에 근간을 둔 동양의 자본주의라는 의미로서의 '유교자본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저자는 네 마리 작은 용들 중에 싱가포르에 주목한다. (이 작은 용은 큰 용이 되었다). 대만은 중국이 G2 국가로 부상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One-China policy)', 즉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이고 따라서 합법적인 중국의 정부는 오직 하나라는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국제적인 위상이 제한적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 편입되어 중국으로 봐야 한다. 남은 국가는 우리나라와 싱가포르인데 싱가포르가 어떻게 오늘의 부(富)와 번영을 이룩했는가를 공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싱가포르를 떠올리면 경이로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서울보다 약간 넓지만, 인구는 6백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도시국가다. 이 도시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2022년 기준)이 8만 3천 불 정도다. 중동의 아랍 국가들처럼 석유가 펑펑 쏟아져 오일 머니로 이룬 경제 성장이 아니다. 더 놀라운 점은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하는 국가부패지수에서 가장 투명한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혹자는 싱가포르가 "아테네 이후 가장 놀라운 도시국가를 만들어 냈다"라고 감탄한다. 최고의 도시 국가, 싱가포르를 이끈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인가?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리칸유(李光耀, 1923~2015)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싱가포르는 195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인민행동당(PAP)이 정권을 잡고 리칸유가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영연방 자치령 싱가포르 총리다. 1963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연방에 편입된 후에 리콴유는 말레시아연방 싱가포르 주정부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연방으로 독립하면서 싱가포르 총리가 되었다. 싱가포르의 정치적 격변기다. 말레이연방에서 독립되었다는 표현보다는 말레이연방에서 축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 당시의 상황을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말레이 이슬람교의 풍습에 따르면, 남편이 부인과 이혼하고 싶을 때는 그저 "탈락(Talak, '이혼하자'는 뜻)"하고 말해 버리면 된다. 물론 부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남자 쪽에서 원하면 이혼 후에도 얼마든지 재결합할 수 있지만, "탈락, 탈락, 탈락"하고 세 번 말하면 재결합도 불가능하다. 상하 양원이 세 번의 본회의를 거쳐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은,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와 영원히 결별하기 위해 "탈락"을 세 번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리콴유는 말레이시아를 남편에, 싱가포르를 부인에 비유했다. 싱가포르는 원치 않은 이혼을 일방적으로 당했다. 정권을 잡고 있는 말레이인의 입장에서는 중국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싱가포르와의 관계가 불편했을 것이다. 말레이연방이 싱가포르를 축출한 사건은 오늘날 다민족, 다문화사회에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독립국가가 된 싱가포르의 선장을 맡은 리콴유는 국가를 설계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리콴유는 31년간 총리직을 수행하며 싱가포르 번영의 초석을 닦았다. 리콴유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경제 분야에는 철저히 자유를 부여해 개방성과 다양성을 갖춘 국가 구조를 설계했다. 실용성을 갖춘 정부 조직, 기업 친화적인 조세·고용 제도, 영어를 기반으로 한 이중언어정책, 항만·공항을 토대로 쌓은 물류 시스템 등으로 싱가포르를 ‘기업 국가’로 부상시켰다. 싱가포르 법인세율은 17%(단일 세율)로 전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이고, 산업군·투자금액·고용창출 규모 등을 고려해 5년 동안 면제 혹은 5~10%로 감면해주기도 한다. 양도소득세와 상속·증여세가 없다.


리콴유를 우리나라의 이승만과 박정희의 장점만을 지닌 지도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승만이 한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군사, 경제 원조를 보장받은 것과,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비약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리콴유와 연결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리콴유가 두 전직 대통령의 장점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핀셋으로 골라내듯이 누군가의 장점만을 지닐 수는 없다. 장점과 단점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박정희와 리칸유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개발 독재의 권위주의적 장기 통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콴유식 장기 독재정치와 권위주의 문화도 싱가포르의 번영 속에 묻혀버렸을 뿐이다. 리콴유는 공개적으로 서구민주주의가 최고의 정치체제라고 말할 수 없으며, 아시아엔 독특한 가치가 있고 현실적으로 개발독재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효과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발상이다.


저자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 총리가 싱가포르와 싱가포르 국민에게 남긴 유산을 두 가지로 평가하고 싶다. 첫째, 그는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다인종주의로 규정하고 "어떤 인종과 민족도 더 우월하지 않으며 싱가포르 국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싱가포르는 중국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말레이계와 인도계가 소수 인종인 국가다. 싱가포르 발전의 토대는 국가의 정체성을 다인종, 다문화로 명확히 규정하고 모든 인종에게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둘째, 그는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덜 부패한 국가', 가장 투명한 국가로 만들었다. 싱가포르는 공무원들에게 고소득을 보장한다. 대신 부패조사국 또는 탐오조사국(貪汚調査局, CPIB)이 엄격하게 부정부패를 파헤친다. CPIB는 1960년 싱가포르에서 제정된 부패방지법에 의해 설립된 총리 직속의 부패방지 및 조사기관으로서 부패 척결을 위해 CPIB에 강력한 수사권과 사법권을 부여했다. 1986년 CPIB가 테칭완 국토개발부 장관이 뇌물을 받은 정황을 보고하자, 리콴유는 공개 조사를 승인했다. 테칭완 장관은 면담을 요청했지만 리 총리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다”라고 답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리콴유는 공무원에게 확실한 처우를 해주되 부정부패에 연루되면 확실한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리콴유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진 않지만 반부패 독재자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도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해왔다. 국가방위와 안전을 위해 공권력을 행사하는 집단, 즉 군인, 경찰, 검찰, 소방관 등을 위해서는 확실한 처우를 해주되 그들의 일탈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말이다. 처우가 빈약하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생겨 견리사의(見利思義), 즉 자신에게 이익이 일이 생기게 되면 의(義)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유혹에 넘어가는 법이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경제를 눈부시게 발전시키고 부패 척결을 달성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가 결성한 인민행동당의 일당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언론 통제와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여당에 유리한 선거제도 또한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의 선거제도 아래에서는 야당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지역구 선거는 의원 1명을 선출하는 단일선거구 14개, 4~6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집단선거구 17개에서 총 93명을 선출한다. 집단선거구는 중국계 외의 소수 종족 후보자가 반드시 포함돼야 하며, 승리한 당이 의석을 모두 차지한다. 득표율과 의석 비율에 큰 편차가 나타난다. 2020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득표율이 61.2%였으나 의석은 89.2% 를 차지하며 93석 중 83석을 차지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인민행동당은 초대 총리 리콴유가 창당해 1959년 선거 이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며 정권교체 없는 일당지배체제를 이어 왔다.


어느 국가나 국부(國父)가 있기 마련다. 국부는 '나라의 아버지'라는 일차적인 뜻 말고도, '나라를 세우는  공로가 많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르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국부는 있는가? 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도 많고 존경받는 지도자는 누구인가? 아니면 국부가 있는데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가?일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내다보는 우리나라는 국부를 놓고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다. 국부 후보자를 놓고 국민투표라도 해야 할 판국이다. 여태 국부조차 떳떳이 정하지 못하고 갈파질팡하고 있다. 국부가 없다면 국가의 뿌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을 것인가? 싱가포르의 국가 초석을 놓았던 리콴유를 재조명하면서 국가의 조건과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 생각하는 이 시간이 무겁다.



이광요. (1998). 리콴유 자서전. 류지호 옮김. 서울: 문학사상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2012). 마하티르. 정호재, 김은정 외 옮김. 서울: 동아시아.

윤원현. (2002). 성리학의 이념과 동아시아 자본주의 경제 발전. 한국학술진흥재단.

김규환, 오상도, (2015). 서울신문.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사망] “죽거든, 내 집 허물라”… 貧國을 富國 만든 ‘反부패 독재자’.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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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민. (2019). 아틀라스뉴스. 리콴유 리더십①…일본 치하에서 얻은 통찰력. 10월 11일.

성유진. (2023). 조선일보. “그의 비전에 경의” 제2 전성기 싱가포르, 리콴유를 소환하다. 7월 20일.

홍준기. (2023). 조선일보. “리콴유가 남긴 다인종주의·반부패 정책이 싱가포르의 힘”. 7월 20일.

KBS. (2007). 유교, 2500년의 여행 - 2부 “의(義), 빠르고 좁은 길”.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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