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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Apr 30. 2024

나의 교육철학②_교학상장(敎學相長)

우리는 누군가의 스승이자 제자이다

저자의 연구실에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조각한 현판이 있다. 강의 시간에 교학상장과 줄탁동시를 자주 강조하다 보니 학생들 뇌리에는 '줄탁동시' '교학상장' 교수로 각인되어 있다. 목공예에 소질이 있는 졸업생이 스승의 날에 선물했다. 나는 졸업생이 들고 온 현판을 보고 그에 대해 경외감을 가졌다. 그 현판은 단순한 목각 작품이 아니라 교육의 정수(精髓)를 잊지 말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다. 교학상장이란 논어에 등장한다.


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학연후지부족 교연후지곤)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지부족연후능자반야 지곤연후능자강야)

故曰敎學相長也 (고왈교학상장야)


“사람이 배우고 나서야 부족함을 알게 되고, 가르쳐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나면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어려움을 알고 난 후에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교학상장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고 가르치면서 서로가 성장한다는 뜻이다. 교사가 학생이고 학생이 교사다. 학습공동체에서 동학(同學)이나 학우(學友)라는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가르치는 사람도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아니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가르치면서 늘 배워야 하고 배우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다(사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모르는 것을 배우는 때가 많다). 교학상장은 남을 가르치는 자의 교만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하다. 학문의 수준이 깊고 높아도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결국엔 배울 수밖에 없다. 교학상장은 가르치며 배우고, 배우며 가르치는 상호협력적 관계를 함축한다. 스승과 제자가 추구하는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이상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효학반(斅學半, 斅은 가르칠 '효'와 가르칠 '학'으로 사용한다)'도 교학상장과 뜻을 나란히 한다. 글자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배움의 절반이다"라는 말이다. 가르치는 내용의 반은 배워서 가르친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배워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곧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나를 돌아보면 나이 육십을 분수령으로 인지능력 현저히 쇠퇴하고 사회변화상을 수용하는 데 필요한 민첩함도 더뎌진 것 같다. 강의시간에 사용할 적당한 단어나 용어가 그때그때 떠오르지도 않는다. 특히 인물의 이름이나 숫자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영어 단어를 적어놓고도 맞게 썼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몇 번이고 확인하게 된다. 요즘엔 강의 시작하기 몇 분 전에 인물, 숫자, 영어 단어 등을 재상기하고 시작한다.


저자는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물어본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질문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알고 싶은 순수한 열정이고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의 궁금증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사람이 유능한 교사다. 교학상장을 교육철학으로 무장하고 교단에 서면 내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가르치는 동시에 내가 미처 몰랐던 지식과 경험을 배운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는 신성한 시간이다. 물론 전공자인 내가 전공분야와 관련해서는 학생보다는 많이 알 수 있겠지만 사회적 경험이나 다른 영역에서의 지혜는 내가 학생보다 잘 모를 수 있다. 교학상장의 멋이다. 교학상장의 철학을 실천하면 1=1=2라는 단순 계산이 아니라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이나 넷이 될 수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의 결합상승이라고 해야 하나.


교학상장의 철학을 견지하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닫게 한다.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 참 묘한 일이다. 많이 배워 많이 알면 모르는 것이 줄어야 하는데 반대다. 그것은 사람이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아예 알려고 하지 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지적 영역과 사고의 지평은 무한대로 확장한다. 


교학상장의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산에 오른다. 자연과의 교감이라든지 상호작용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저 자연 속을 걷고 나무를 보는 것이 좋다(산을 자주 오르다 보면 산은 어머니의 품으로 느껴진다. 어머니의 품 안이 얼마나 따뜻하고 안온한가). 도심의 빌딩 사이로 하늘로 보는 것과 울창한 숲 사이로 하늘을 보는 느낌은 차원이 다르다. 산길을 걸으며 주변의 나무며 화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나무는 어떤 쓰임새가 있고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든가, 어릴 적 이 나무를 약재로 사용하여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받았다'라는 등등의 경험담을 듣고 나누다 보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경외의 대상이 된다. 누군가 알고 있던 나무나 화초에 대한 지식이나 실제 사용 경험을 이야기하면 듣는 동료들은 추임새와 추가 질문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이제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 증폭된다. 5월 나무 이파리가 연녹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는 때에 산을 오르면서 누군가 '아카시아꽃이 진하다. 온통 아카시아나무네'라고 말했다. 옆의 동료가 '아카시아가 아니라 아카시나무래요. 아카시아는 전혀 다른 나무라고 해요. 그리고 아카시나무는 우리나라 정부가 광복 후 민둥산을 녹화하기 위해 조림사업의 일환으로 심은 거래요.' 그들의 대화로 아카시나무에 대한 정확한 이름과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집에 와서는 산에서 나눴던 나무와 화초의 이야기를 놓고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나무와 화초의 이름과 그들의 존재 가치를 알고 가면 그들과 더 깊이 있는 교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길은 어느새 나의 만족을 위해 가는 등산로가 아니라 나와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연결고리가 된다.  


교학상장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질문이 많다. '질문을 하는 것'은 유일하게 학습이 필요한 동물로서 인간이 인간다움의 실현을 위한 숭고한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알아야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기도 하지만 알고 깨달아 공유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새로 출판된 책이나 논문을 먼저 읽거나 정보를 습득하여 먼저 깨닫고 알고자 한다. First Reader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앎을 밑천으로 사유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알아야 면장(面牆), 즉 '공부하고 익혀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지 않던가(일상에서 널리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인 '알아야 면장(面長)을 하지'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 역시 '왜, 하필이면 면장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면장 말고도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많을 텐데라는 질문말이다).


교학상장이 공부하는 사람이 입는 옷이라면 불치하문(不恥下問)은 옷을 채우는 단추다.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모르면 묻고 배워야 한다. 교학상장은 평생학습자로서의 기본자세에 관한 것이다. 또한 교학상장은 곧 권학문(勸學文), 즉 젊어서나 늙어서나 배움에 정진하라는 것이다. 주자의 말이다.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올해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해와 달은 쉬지 않고 뜨고 지고, 흐르는 세월은 나를 기다리지 않네. 오호라, 늙어버렸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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