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사에서 한나라와 초나라가 천하 쟁패를 놓고 다퉜던 과정을 그린 <초한지>의 원전에 해당하는 사기(史記)를 읽다 보면 여러 군데에서 <삼국지연의>의 내용과 유사한 대목을 발견한다. 어디 <초한지>와 <삼국지연의>의 내용만 그렇겠는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지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그 맥락과 내용은 엇비슷한 것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그 맥락을 좇아가보기로 하자.
첫째, 진나라 말기 반진(反秦) 세력의 결집과 후한(後漢) 황건적의 난 진압을 위한 군웅들의 이합집산은 닮은 점이 많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은 후에도 2세 황제 호해(胡亥)는 폭력과 수탈에 기반한 폭정을 계속해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가 극에 달했다.호해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황제의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사람은 환관 조고였다. 호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예언서가 등장한다. 진시황의 불사약을 찾아 바다를 건너간 방사들은 약은 구하지 못하고 예언서를 가지고 왔다. '진나라는 호(胡) 때문에 망한다(亡秦者胡也)'라는 내용이 담긴 예언서였다. 진시황은 호(胡)는 곧 북방의 오랑캐 흉노라고 단정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단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진 사실은 진시황의 아들 이름이 호해였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던가.
이제 호해의 폭정과 악행에 전국에서 군웅들이 거병하였다. 군웅들의 목표는 진나라 타도였다. 진승과 오광이 먼저 거병하였지만, 그들의 세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항우와 유방이 대표적인 의병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항우와 유방이 경쟁적으로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게 되면서 진나라는 통일국가 수립 후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진나라가 멸망한 뒤 항우는 무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유방의 몫이었던 관중왕을 빼앗고 스스로 초패왕의 자리에 오른다. 항우는 논공행상에서 유방을 파촉으로 쫓아내 버렸다. 진나라 타도라는 대의와 기치 아래 모였던 반진(反秦) 세력은 진나라가 멸망하자 전국시대로 되돌아가다시피 했다. 중국이란 거대한 영토가 옛 육국시대, 즉 초, 제, 연, 조, 위, 한나라가 왕을 맞아들이고 독립국가로서 기세를 재현하였다. 무엇보다 진나라를 멸망시키면 새로운 황제를 중심으로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새로운 군벌들이 천하쟁패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다시 열렸다.
후한 삼국시대에도 진나라 말기와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창궐했을 때 전국의 군웅호걸들은 민란 평정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모였지만, 민란이 평정된 후에는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 독립된 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낙양(洛陽)으로 불려 왔던 동탁(董卓)이 허수아비 황제를 옹립하고 권력을 쥐락펴락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고 동탁만 제거되면 새로운 황제를 구심점으로 왕정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조조, 유비, 손권을 비롯한 군웅들이 천하통일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되풀이했다.
둘째, 삼국분립론이다. 초한쟁패기에 제기된 삼국분립은 항우 측에서 낸 아이디어다. 한신이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무찌르고 제나라를 평정했을 때다. 한신을 무시했던 항우가 한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섭(武涉)이란 책사를 한신에게 보내 유방, 항우, 한신이 다스리는 삼국분립론을 제안했다. "지금 장군께서는 한나라 왕과 두텁게 사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한나라 왕을 위해 힘을 다해 군대를 지휘하고 있지만, 결국 그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장군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항왕이 살아있는 덕택입니다. 한나라 왕과 항왕 두 사람의 싸움에서 승리의 저울추는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장군이 오른쪽으로 추를 던지면 한나라 왕이 이길 것이고, 왼쪽으로 추를 던지면 항왕이 이길 것입니다. 오늘 항왕이 멸망하면 다음번에는 장군을 멸망할 것입니다. 장군은 항왕과는 연고가 있습니다. 어째서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손을 잡고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왕이 되지 않습니까?"
한신의 책사 괴통(蒯通) 역시 삼국분립론을 적극 주장하며 한신이 제나라 왕에 머물러 있기를 간언했다. "지금 한나라 왕과 항왕의 운명은 장군에게 달렸습니다. 장군은 군주를 떨게 할 만한 위세를 지녔고, 상을 받을 수 없을 만큼 큰 공로를 가지고 계십니다. 초나라로 돌아가더라도 항왕이 믿지 않을 것이고, 한나라로 돌아가도 유방이 떨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대체적인 형세가 신하의 자리에 있으면서 군주를 떨게 하는 위세를 지니고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으니 장군은 위태롭습니다."
한신이 유방의 황후 여치에게 살해당하면서 한 말이 있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결과론적으로 한신이 책사 괴통이나 무섭의 계략을 들었다면, 초한쟁패의 향방은 또 다른 결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괴통의 계략을 듣지 않다가 나중에 모반을 도모한 것은 그가 늘 강조했던 시세와 강약에 대한 종합적 판단력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한신은 지략과 병법을 구사하며 군사를 부리는 데는 천재적 재능을 가졌지만, 정무적 판단 능력은 부족했지 않았나 싶다.
후한 시대에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한 삼국정립론도 위의 삼국분립론과 비슷한 맥락이다. 제갈량은 융중대(隆中對)에서 유비에게 중국 지도를 펴놓고 삼국정립에 대해 설명한다. 제갈량은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점령함으로써 조조, 손권과 함께 중국을 셋으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 손권과 동맹을 맺고 조조를 막아내며, 유사시 형주를 통해 바로 지척인 낙양을 공격하고 익주의 군대는 장안(長安)을 공격하면 조조를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제갈량의 삼국정립에 대한 기본 전략을 살펴보자. "만약 형주, 익주를 차지해 그 험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화목하고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 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으로 출병하신다면, 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셋째,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의 군대가 위나라를 평정할 때 강에 길을 만들어 도강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신은 목앵부(木罌缶), 즉 입구가 좁고 배가 불록한 모양의 나무통에 물을 담아 여러 개를 한 줄로 묶은 뒤 그 위에 판자를 깔아 강을 건넜다. 오늘날의 부교(浮橋)다. 한신의 공법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도강 기술이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정조가 화성 순행에 나섰을 때 한강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배를 이어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 부교를 만들었다. 다산은 한신이 이용했던 목앵부를 개선하여 배를 엮어 부교를 만들어 조선 실학자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다산의 부교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80년대 병역의무 기간에 육군 공병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부교를 설치하는 데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부교는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하던 구조물로 무겁고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신이 목앵부로 엮어 만든 부교는 시공을 초월하여 20대의 저자가 무거운 철제 구조물을 옮겼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역사는 시공간과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이지 그 저변에 놓인 맥락은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역사를 견인하는 지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전적으로 계승 또는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인문학에 귀를 기울이고 고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