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패왕(楚覇王) 항우는 뭐든 폭력과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패왕이란 호칭은 장량이 삼황오제와 춘추오패 등을 참고하여 작명하고 항우에게 추천했다. 패왕에서 '패'라는 글자의 의미도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항우는 왕이란 칭호는 너무 낡고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패왕을 선호했다. 책사 범증은 항우에게 왕도와 패도에 대해 설명하고 패왕이라는 호칭을 당장 버리고 장량을 처단하라고 충고하지만, 항우는 일축하고 오히려 장량을 옹호한다.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항우에게는 상식과 순리를 통한 문제해결은 어색하다. 초회왕이 함양을 먼저 차지한 자에게 관중왕을 준다고 약속했지만, 함양을 먼저 차지했던 유방은 그런 항우를 무서워하며 그를 달래기 위해 전국 옥새를 바친다. 관중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항우는 초회왕에게 관중왕을 승인받아야 하는데 초회왕은 당초 함양을 먼저 차지한 사람에게 관중왕을 준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허락을 하지 않았다. 항우는 초회왕의 허락 따위는 무시하고 스스로 관중왕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초회왕의 지위를 의제(義帝)로 격상시키고 자신은 초패왕이란 이름으로 즉위했다.
왕이 된 항우는 논공행상에 필요한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진시황릉을 파헤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파헤친 무덤에서 엄청난 부장품을 탈취하여 통치 자금으로 사용하고 지하 아방궁에는 불을 놓았다. 불은 무려 3개월이나 탔다고 한다. 항우가 논공행상을 할 때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유방이었다. 항우 자신이 유방이 앉아야 할 관중왕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유방의 처우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사 범증은 항우에게 유방을 한왕(漢王)이라는 명목으로 파촉으로 보낼 것을 건의했다. 파촉은 서쪽 변방이기도 하지만 유방을 유배 보내는 것이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누군가의 아래에서 지시나 명령을 받는 성정이 아니었다. 의제의 제후에 해당하는 관중왕에 만족할 항우가 아니었다. 황제 노릇을 하고 싶은 항우는 의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의제는 항우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 방해꾼이 될 뿐이었다. 항우는 영포(英布)를 시켜 의제를 시해한 뒤 강물에 던져버렸다. 의제의 시신은 인근 백성들이 건져내 장사를 지냈다. 항우가 의제를 죽인 사건은 민심이 항우로부터 유방으로 향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항우의 포악하고 거친 성정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진나라에서 귀순해 온 20만 명의 병사들을 생매장한 신안대학살 사건은 항우란 인간이 아니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항우는 무력을 행사하여 천하를 통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잠시 일신의 영광을 누리고자 영원히 망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지도자가 아는 것이 부족하고 지혜가 없으면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항우는 귀가 얇고 무지한 데다 충성스러운 참모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항우가 아부(亞父)로 모셨던 책사 범증의 죽음도 항우로부터 비롯됐다. 우둔하고 귀까지 얇았던 항우는 유방의 책사 장량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한 수 위였던 범증을 유방의 간계에 넘어가 내쳐버렸다. 범증이 항우를 떠나는 순간 항우의 내리막길은 예고됐다. 이와 반대로 유방은 항우보다 세력은 약했지만, 관용과 관대함으로 인재를 품어 안고 유능한 참모들의 의견들을 적극 수용했다. 항우와 유방의 그릇은 그 크기부터가 달랐다. 지도자가 유능한 참모를 쓰며 그들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그러나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권력자에게는 백약이 무효다. 항우와 유방의 인격을 비교하면 전쟁터에서조차 인격은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