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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6. 2020

노블레스 오블리주 ②

경주 최 부잣집의 경우

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유사어와 반대어는 무엇일까? 유사어는 Richess Oblige(리세스 오블리쥬). 영연방 유대교 최고지도자 조너선 삭스(J. Sachs)가 소개한 용어로 부를 누리는 계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어는 Noblesse Malade(노블레스 말라드). 기득권 세력이 힘을 믿고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행위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지혜의 대부분은 성경에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전(原典)은 신약 누가복음(12:48)이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다.” 심플하지만 정곡을 찌른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가문이나 사람은 누구일까? 경주 최 부잣집(경주시 교동 소재)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 이 가문은 9대 동안 진사를 배출했고, 12대에 걸쳐 만석꾼이었다. 시조는 최진립(1568-1636).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조선 3대 국난에 참전한 참전 용사다.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 가문은 무려 300여 년 동안 존경받는 부자였다. 특별한 원칙이 있었다.


최 부잣집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위한 원칙을 정하고 대대로 이를 철저히 지켜냈다. 수신은 육연(六然)이요 제가는 육훈(六訓)이다. 육연은 최 부잣집 구성원들이 자신을 다스리고 행동하는 6가지 원칙이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제가를 위한 육훈(六訓)은 보다 구체적인 실행 원칙이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2)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3)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4)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최 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진사는 과거의 초시 합격자다. 조선 시대 신분사회에서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소과(小科) 진사에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자격과 대과 응시 자격을 얻는다. 출세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반면 시험에 합격했더라도 관직을 제수받는 것은 아니다. 진사는 일종의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불과하지만,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양반의 신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4대 내에 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품계라도 있어야 해야 했다. 그래서 종 9품이라도 품계를 따려면 소과라도 합격해 진사나 생원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왜, 최 부잣집은 후손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금지했을까? 정치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과(大科)에 합격하고 중앙에 진출하여 고위 관리직을 맡아 권세를 얻게 되면 자칫 정쟁에 휘말리고 가문과 재산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는 신념에서였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화근을 경계한 지혜다. 영국 속담에도 “벼슬이 높을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라고 하지 않던가.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재산 만석은 쌀 1만 가마에 해당한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는 데, 그 방법은 소작료를 낮추는 것이다. 당시 소작료는 대체적으로 수확량의 7~8할 정도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5할이나 그 이하로 받았다. 오늘날 높은 임대료가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을 생각하면 눈여겨볼 대목이다.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에는 쌀 한말 정도의 헐값에 논 한 마지기를 팔아넘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흰 죽 한 끼 얻어먹고 논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흰 죽 논'의 유래다. 최 부잣집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악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을 경계했다. 공정한 거래도 아니고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1년 소작 수입 3천 석 중 손님 접대에 1천 석, 빈민구제에 1천 석, 가용에 1천 석을 썼다. 전국에서 워낙 많은 과객들이 찾아왔는데 많게는 100명 정도의 과객이 머물렀다. 본가에서 손님 수용이 어려우면 인근 노비 집으로 분산하여 접대하였다. 접대 기준을 세워 지켰는데 상객은 매끼 과메기(마른 청어 또는 마른 꽁치) 한 마리, 중객은 반 마리, 하객은 4분의 1마리를 접대했다. 집을 떠나는 나그네에 대해서는 과메기 한 손(두 마리)과 하루 분의 양식, 그리고 몇 푼의 노자도 챙겨주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100리는 40km다.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 서로는 영천, 남쪽으로는 울산, 북으로는 포항을 포함한다. 불교의 경전에 "중생이 아픈데 내가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를 실천한 것이다. 흉년이 들면 자신의 마을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의 빈민을 구제하는 것에는 이해가 가지만, 동서남북의 빈민을 구제한다는 발상과 실행에는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국가에서 구휼미를 푸는 것도 아니고 한 가문이 이렇게 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최 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관리한다. 재산 관리에서 상당한 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었다.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보릿고개 때에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수저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동병상련을 실천하였다.

     

해방 후 최 부잣집은 교육사업에 재산을 환원했다. 대구대학(현재의 대구대학이 아님)을 설립하고 장서 8천 권을 대학에 희사했다. 6.25 전쟁 후 경주에 피난 내려온 교수들을 중심으로 계림학숙(鷄林學塾) 설립하고 서울 수복 후에는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합병하였다. 5.16 군사혁명 후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조건 없이 대학을 인계했다. 이병철은 기업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대학 경영을 계획했고 대학 인수 당시에는 한수 이남에서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공업의 ‘사카린 밀수사건’(삼성과 정부가 공모한 정경유착으로 밝혀짐)이 터진다. 사카린은 설탕보다 300배 단맛을 내는 인공감미료로 1960~1970년대 각광받았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처한 삼성은 한국비료공업을 국가에 헌납하고 대구대도 포기했다점잖은 표현으로 포기지 실제로는 이병철이 박정희에게 상납하였고 박정희는 강탈했다. 현재 영남대학은 당시 지역 사립대학이었던 청구대학(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합병하여 생긴 대학이다. 영남대학 설립 주체인 학교 법인 영남학원 정관 1조(목적)에는 '설립자 박정희 선생의 창학 정신에 입각하여...'라는 문구를 명시하고 있다. 경주 교동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에서 관리하고 있다. 최 씨 집안의 고택, 논, 선산이 모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해 관계에 밝은 장사꾼의 탐욕과 무소불위의 거대 권력을 행사한 국가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형을 망가뜨렸다.


지위와 권세가 높을수록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앞장서서 실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공동체를 살만하게 만들어나가는 사막의 오아시스다. 경주 최 부잣집 가문을 통해 절약, 절제, 배려, 겸손, 희생과 같은 고귀한 인간성을 확인한다. 권력자와 부자들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있다. 


조응헌(2002),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푸른 역사.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2385.html#csidx58e1ffcc1c970229856f250638b0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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