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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6. 2020

노블레스 오블리주 ③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경우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Wallenberg family)은 스웨덴을 대표하는 금융가와 기업가이다. 160여 년에 걸쳐 5대째 세습 경영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습 경영에 대한 국민 정서가 부정적이지만, 발렌베리 가문에서는 세습을 통해 후계자에게 경영을 맡긴다. 오늘날 발렌베리 가문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창업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André Oscar Wallenberg)다. 이 가문에서는 1856년 스웨덴 최초의 근대적인 상업은행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익히 알려진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발전설비업체 ABB,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등 산하에 100여 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GDP의 30%(2010년 기준) (GDP의 30% 규모의 세계시장 매출로 평가하기도 함), 종업원 수는 스웨덴 인구의 4.5%(2009년 기준)를 차지할 정도로 스웨덴 사회와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의 구성원들이 시대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완벽하게 처신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 가문을 놓고 볼 때 역사적, 사회적으로 옳은 일을 했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 가문의 라울 발렌베리는 외교관으로 2차 대전 중 수천 명의 유대인을 홀로코스트에서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야곱 발렌베리는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회를 위해 기여를 많이 했지만 친일 행적으로 그 빛이 바래는 우리나라 명사들과 유사한 상황이다. 


이 가문의 경영 철학은 기업 소유는 특권이 아닌 사회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기업가는 이윤을 창출하고 부를 축적하면서 누리는 특권층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경영 철학은 이 가문이 경영과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하게 하는 지렛대다. 발렌베리 그룹 산하 기업들은 노조 대표를 이사회에 의무적으로 중용해 경영 참여를 유도한다. 노동자를 동등한 경영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회사에 대한 주인 의식을 높이고 상생경영을 한다는 취지에서다. 우리나라 삼성은 이 가문의 기업을 롤모델로 삼고 경영자들은 오랫동안 인간적인 친분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삼성은 기업의 가치는 세계 일류지만 지배구조, 노사 문제 등을 생각하면 이 가문의 '착한 경영'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발렌베리 가문이 추구하는 또 다른 대원칙은 '생활은 평민처럼, 기부는 귀족처럼'이다. 스웨덴 최고의 부자지만 남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사회를 위한 기부에는 귀족처럼 하겠다는 발상이다. 아무리 성공한 명문가라도 사회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성공한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자기를 낮추고 사회를 위해 섬김 리더십을 발휘할 때 기업은 good to great가 된다. 이 가문도 경주 최 부잣집과 같이 구체적인 실행 원칙을 정하고 대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가문의 후계자 자격 조건에 눈이 가는 이유다.

  

 후계자의 자격은 크게 네 가지다. (1)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마칠 것.  (2) 영어는 기본이고 몇 개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것(언어장벽이 존재할 경우, 원활한 경영이 쉽지 않다), (3) 해군 장교로 복무할 것(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도 해군 장교 출신이다. 군대에서는 리더십을 기를 수 있고 해군 특성상 다양한 해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4) 부모의 도움 없이 세계적 금융 중심지에 진출해서 실무 경험과 금융 흐름을 익힐 것. 이런 원칙에 따른 후계자 평가는 10년 넘게 걸리며, 견제와 균형을 위해 두 명을 뽑는다. 선발된 두 명은 차례대로 산하 회사들의 경영진으로 참여하며 경영 수업을 받다가 최종적으로는 그룹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터 AB, 그룹의 모태인 SEB의 CEO 직책을 교대로 수행한다. 한쪽은 제조업, 한쪽은 금융을 맡는 투톱 경영 체제다. 어느 한쪽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으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다. 재단과 그룹 경영자는 급여만을 받는다. 이들은 세계 1000대 부자, 스웨덴 100대 부자 명단에 끼지도 못한다. 천문학적인 스톡옵션이니 상여금이 없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


후계자 자격을 보면 한마디로 엄격하다. 키워드는 독립심, 규율, 커뮤니케이션 능력, 사회 참여, 사회 경험, 리더십, 국가관, 국제 감각, 균형 감각, 성과. 후계자의 자격 기준이 곧 발렌베리 그룹이 지향하는 기업 가치관으로 연결된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라는 격언이 있다. 가문이 추구하는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집 바가지가 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문에서 발생하는 형제간 불화나 상속 문제, 기업 내부의 회계처리 문제 등은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발렌베리 가문은 내부에서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균형 잡힌 사고와 의사결정 능력을 구비한 CEO를 요구한다. 


스웨덴과 우리나라의 기업 문화와 기업에 대한 국민적 정서도 다르다. 스웨덴도 20세기 초 극심한 노사 갈등과 파업 등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경험했다. 결국 노사정의 대타협(1938년 살트셰바덴협약)을 통해 노조는 경영자들의 지배권을 보장하고, 기업은 일자리 제공과 기술 투자에 힘쓰며 기업 이익금의 85%을 사회보장 재원(법인세)으로 내놓기로 했다. 노사가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발렌베리 그룹도 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도 노사정 타협 기구가 있다. 갈등 없는 사회가 어디 있겠는가? 노사정의 입장은 각각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타협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노사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한번 대타협에 도달하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정권의 부침에 따라 손가락 뒤집기식으로 변덕을 부리는 것은 상생이 아니라 상망에 이르는 길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 주체들이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 철학과 방식은 우리나라 기업이 지향했으면 하는 롤모델을 제시하는 것 같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593963.html

http://www.readabstracts.com/Business-international/Keeping-it-in-the-family-Flight-from-the-nort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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