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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7. 2020

노블레스 오블리주 ④

사회 지도층의 참전_의병장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국가 또는 공동체가 국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난다. 국난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전쟁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많은 외침을 당했던가? 그때마다 사회 지도층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목숨을 바쳤다. 항중, 항몽, 항청, 항일 의병. 인류사에서 우리나라만큼 외세의 침략과 핍박에 맞서 거병한 의병의 숫자(인구 대비)가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불의를 보고 행동하는 정의로운 마음이 어디 가겠는가? 우리 사회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는 원동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약한 의병장들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다.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나 7년 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중일 삼국 전쟁이었으며 이 전쟁에는 유럽인과 흑인까지도 참전했다. 전쟁을 임진동아시아 전쟁이라고 부른 이유다. 무비무환(無備無患)의 조선은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기, 군인, 전략, 전술, 사기. 전쟁하겠다고 대외적으로 천명하면서 만반의 전쟁 준비를 한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고 올라왔다. 국왕 선조와 동인, 서인 편 나눠 정쟁으로 날새는 줄 몰랐던 신료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의주로 야반도주(몽진)하였다.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노비문서를 소각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하지만 민심은 궁궐을 태워서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군이 맥없이 패배하고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한다. 명나라의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이때 명나라는 국운이 쇠퇴하여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며 민심 이반도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북쪽 만주족의 기세가 사나웠다. 사가들은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하면서 국력이 더 쇠해지면서 멸망에 이르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개전 초기 조선 정규군은 가을 태풍에 쓰러지는 볏단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왜란의 관전 포인트는 의병의 거병이었다. 의병의 사전 정의는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자위군"이다. 조선 의병들은 1593년 정월 기준 2만 2600여 명으로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했다. 조선 팔도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을 통솔한 의병장을 나열하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경상도 곽재우, 정인홍, 김면,  호남 김천일, 고경명, 충청도 조헌, 경기도 홍계남, 우성전, 함경도 정문부... 


의병장의 면면을 보면 사회의 노블레스이면서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의병장들은 대개 중앙과 지방에서 관료를 지낸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무인 출신은 소수였다. 그들은 지방 공직자로서 지역민에게 선정을 베풀고 덕을 쌓았다. 관료가 아니라도 평소 고장에서 덕망이 있어 추앙받는 자들도 의병장이 되었다. 오늘날의 공직자이거나 글을 읽고 시를 읊던 선비들이 칼을 빼들고 떨쳐 일어났다. 어디 문반과 무반뿐이었던가? 조선에서 가장 배척받으면서 온갖 부역(평시 승려들은 성곽 축성에 동원되거나 종이를 만들었음)을 도맡았던 승려들도 거병했다. 의승군(義僧軍)이다. 충청도 영규, 인준, 황해도 의엄, 법정, 강원도 유정, 호남 처영. 나라에서도 승통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의승군을 모집했다. 호국불교. 승려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던 고승 휴정(서산대사)은 의승군을 총지휘하는 도총섭(都摠攝)의 직책을 제수받았다. 정유재란 종전 후 유정(사명대사)은 조선 대표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카와 이에야스와 강화 및 포로 귀환 협상을 벌였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3000여 명을 데려왔다. 누란의 위기에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의병은 지위고하,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었다. 나라가 있고 백성도 있다.  


의병장의 공통점은 전직 관리를 지내면서 지방민과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었거나 유학자들로서 학식과 덕망이 출중해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전쟁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장서 실천한 사람들이다. 신분 계급 사회에서 실력과 덕만을 갖춘 지역 명망가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서니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누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간디는 리더십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단지 산책을 하고 있을 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가는 평상시 지역사회에서 덕망을 얻어야 한다. 덕승재(德勝才). 평소 따르는 자가 없는데, 목숨을 내놓는 유사시에는 누가 따르려고 할 것인가? 사회에서 노블레스가 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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