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체계를 가지고 배우던 세대이다.
정규 교육에서는 선생님이 짠 커리큘럼에 따라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해도 어느 정도의 배움이 있던 세대.
배우는 시간에서 스승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존중을 받고 가르침을 받던 세대.
선생님이 내가 할 길을 미리 계획하고 그 계획에는 나름 매 시간의 연결고리를 가져, 배움의 단계 사이에 어려움이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던 세대.
그는 보고 배우던 세대이다.
선생님의 커리큘럼일랑 존재하지 않고, 매일의 일상에서 녹여 있는 걸 "어깨너머" 배우던 세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세대이고 스승이 의미없이 던지는 그 말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어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세대.
선생님이 자신의 일상을 지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본인의 궁금함을 해결하던 세대.
이렇게나 다른 두 세대가 같은 공간에 24시간을 붙어 있으니,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가르쳐 달라 말했고, 그는 물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기초적으로 아는 것이 있어야, 궁금한 것도 생기지 않겠냐고 주장했고, 그는 옆에서 보고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아느냐는 말만 했다. 물어봐야 가르쳐 줄 수 있다고도 했다.
"질문" 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인지를 아버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의 올챙이 시절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 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궁금해 할 지 잘 모르셨을거다 하고 지금은 생각이 들지만 그때 당시엔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화가 많이 났었다.
나는 큰 길만 제시하고 자세한 가르침은 주지않는 아버지가 답답하다 느꼈다.
그는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끙끙대다가 사고쳐놓는(나는 그런 실수조차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짜증이 났다.
아교를 고아 나전을 붙이는 데 사용한다.
아교를 중탕해서 열기로 녹여야 액체가 되어 끈적한 아교를 접착제로 사용할 수 있다.
직접 불을 대면 타기 때문에, 밥솥크기의 그릇에 물을 담고 그 물에 아교통을 넣고 끓이면 끈덕 하게 녹는다.
아버지가 하는 것을 " 보고 배운대로" 적당한 크기의 그릇에 넣고 보글보글 끓여놓고 다른 일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다".
자리를 비우기 전 아교를 바를 붓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으므로 그 붓을 중탕그릇에 넣고, 물에 적셔 풀기를 함께 빼준다. 그 붓에서 나온 아교덕에 중탕그릇의 물에 끈기가 생기므로 보글보글 끓으며 기포를 형성한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끈기있는 기포는 쉽사리 터지지 못하고 손에 손잡고 중탕그릇의 벽을 향해 오른다.
중탕그릇의 높이와 아교그릇의 높이는 같다.
중탕그릇의 벽을 올랐다는 것은 아교그릇을 올랐다는 말과 같다.
벽을 타고 오른 물이 아교그릇에 가득 담겨 버린다.
적당한 끈기를 가져야 하는 아교풀이 아교물이 되어버렸다.
사고를 쳤으니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든다.
사고를 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든다.
하지만 주의사항을 가르쳐주지 않던 아버지스승님이 면박을 주시는 순간 죄송한 마음은 반감이 되어버린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관찰력을 가지고 보고 배워야 하지만, 사람이 보는 것만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귀로 설명도 듣고, 손으로 만져도 보고, 직접 해보고 배운다는 것은 직접 해보는 순간의 실수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앞에 말한 "아교물" 사건은 많은 사건사고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에 아버지께서는 귀찮고 욱하고 짜증나는 감정이 수 없이 있으셨을 것이다. '사람을 교육하고 키운다는 것' 에는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지금 하필이면 영어'선생'을 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나니 일견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들이 온다.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으면 배움이라는 것이 더디다는 것, 이론을 가르쳐 주고 나서 문제를 풀려도 적용에서 실수는 나온 다는 것, 배우는 이의 깊은 고민없이는 친절한 설명 역시도 무의미해진다는 것.
이전엔 배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답답함만 존재했다면, 이제는 배움을 '주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소의 뿔을 가지고 홀로 가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예전 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화를 내기 보다는 정황설명을 해준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 보며, 엉덩이 뿔난 제자가 제법 괜찮은 선생일 수 있겠다 싶다. 사람의 모든 면은 암튼 어딘가 쓸모는 있다.
깨달음은 항상 늦고 동 시대 안에서는 내가 선 자리에서만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
이해보다는 오해가 빠르다.
이해의 시간은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온다.
우리가 함께한 9년의 시간동안 밝고 어두운 극단의 감정이 함께 쌓여 갔다.
서로를 견디며 세월을 이고 강산이 한번 변할 만큼 함께 했는데 서로에게 원망의 마음이 많았다.
지금은 더 큰 어른인 아버지가 "그래도 너만큼 해줬던 제자가 없다." 하시고, "다시 꼭 작업 했음 좋겠다." 해주시지만 나에게 나전칠기와 아버지는 한 묶음이 되어 한켠에 아픔처럼 자리하고 있다.
나전칠기라는 것이 나의 삶에 굵직한 흔적을 남겨 나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있어, 언젠가는 꼭 다시 해야하는 일 이라는 마음이 있지만, 쉽사리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세월간 켜켜히 쌓인 잔상처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통하지 않는다를 넘어, 아픔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