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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mi OH Oct 07. 2024

Lature 탄생기

영국 런던에 있는 왕실박물관 V&A 에 작품이 다섯 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세 점은 Lature 시리즈이다. Lature 는 Lacquer + Texture 의 합성어로, 레이스를 사용한 칠기 시리즈 이름이다. 전통의 과정을 고스란히 지키며 따랐지만, 소재의 변주를 통해 작업했다. 똑같은 '하얀색' 이어도 그 채도와 명도에 따라, 그 반짝임의 정도에 따라, 그 결의 차이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막 알아가던 참에 소재의 연구 과정에서 만난 결과물이었다.  


익숙하고 오랜 것의 변주로도 얼마든 새로운 이야기는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 꼭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이라는 개념은 꼭 고정되고 박제되어 있는 경향이 큰데, 특히 그 고정의 이미지는 기나긴 역사를 가진 탓인지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통공예를 합니다. 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유물을 재현합니다 와 같은 의미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지금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조선시대의 것들을 재현하는 것 자체의 의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 이라는 것이 반드시 과거의 것에 국한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 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전해져서 통한다는 것이므로, 이전 세대의 것이 전해져서 지금의 흐름을 관통해야 진정한 의미의 전통이 아닌가 한다. 

박제되고 고정되어 있는 전통을 파격하고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 비틀어내어 새로운 흐름으로 끌고 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비틀어 내는 것도 결국 기존의 전형성이 든든히 뿌리 내리고 있어야 가벼워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삼베와 모시와 실크를 기물에 붙이는 작업은 칠기 작업의 한 과정이다. 나무를 잘 말려서 기물을 만들어야, 기물이 터지지 않고 그 수명이 오래 가는데, 잘 말린 나무를 사용 하더라도, 여전히 계절에 따라 나무는 숨을 쉰다. 수축하고 이완하고 우리의 생명과 함께 반려한다. 다른 결의 호흡 덕에 결구가 약해져서 기물은 자연스레 소멸한다. 나무의 생명력을 사랑하지만 그 생명력이 단점이기도 하니 묘하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님들은 기물의 변화를 막기 위해 옷을 입혀 작업했다. 그 옷을 입히는 과정이 삼베 바르기 과정이다. 그리고 수 없는 칠의 과정을 통해 삼베는 자신의 결을 드러내지 않지만, 단단하게 속의 변화를 지켜준다. 속옷의 개념인 이 삼베 바르기 과정이 2000년대에 들어서며, 결을 드러내어, 개성으로 자리 잡았었다. 이후의 과정의 생략으로 인해 처음에는 이 삼베의 결을 살려 칠을 한다는 것이 처음엔 낯설었겠지만, 그 모양에서 자연스러움이 있었으므로 곧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그리고 나전칠기의 한 흐름이었으므로 나도 하나의 공정으로써 배움을 가질 수 있었다. 


하루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조들이 사용하던 함의 결구는 한옥의 결구와 같고,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서로 영향을 끼치고 비슷한 구조를 띈다. 조선시대의 그들은 삼베나 모시, 실크를 이용해 일상복을 만들어 입었고, 그렇기 때문에 함의 결구를 보호할 생각으로 그 천을 사용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매일의 사물이 매일의 재료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일상의 우리는 삼베나 모시옷을 "전통"의 소재로 여기고, 지금은 삼베옷 모시옷은 잘 입지 않는데, 지금의 우리의 생활을 지키고 있는 소재를 나전칠기에 이용해 볼 수는 없는 걸까? 그리고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삼베처럼 기물을 보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씨줄날줄의 결을 드러내어 줄 수 있는
어떤 소재가 있지 않을까?” 

며칠을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레이스였다.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면서도, 기물을 자연스럽게 감싸 보호해 주었고, 어떤 소재보다도 결의 형태를 즐길 수 있는 소재. 

새로운 것을 할 때, 이거다! 싶을 때 마음이 두근거림이 있다. 나의 내재된 본능과 육감이 "이거야" 하고 나침반이 되어 주는 것처럼 심장이 콩콩콩 빠르게 뛰며 이건 해야 해 하고 말을 한다. 조색 작업을 할 때 처음으로 육감의 신이 심장의 두근거림을 점지 해주셨고 그 다음이 바로 이 Lature 작업을 하던 순간이었다. 심장이 두근대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동대문 종합시장으로 달려서 샘플을 이것저것 주워왔다. 스와치 라는 개념도 그 때 처음 배웠다. 잔잔한 결 에서 큼직큼직한 결의 그것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가져왔다. 물론, 새롭고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하는 딸의 모습을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했을 리 없다. 일단 삼베처럼 기물에 찰싹 잘 달라붙는지 실험을 먼저 했다. 넓은 나무 판에 받아온 스와치를 나란히 붙여 보았다. 삼베대신 레이스를 사용하는 것 외에는 모든 재료는 똑같이 사용 했다. 칠풀을 사용해 붙였기 때문에 습도와 온도를 맞추는 일도 잊지 않았다. 초조하면서도 기대하면서 두근거리면서도 다음날 칠풀이 마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꺼내든 나무 판, 완벽하게 잘 말랐다. 그리고 뜯는 실험에서도 삼베와 비슷한 강도로 잘 붙어 있어주었다. 그렇지만 패턴 자체의 선이 굵은 레이스는 들뜸이 있긴 했다. 칠풀로만 고정이 힘든 패턴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때때로 본드가 필요하기도 했다. 


칠까지 올리는 과정은 험난했다. 아버지의 질타를 견디는 것도 실험의 한 과정이었다. 테이블 상판에 붙이려니 좁은 면을 붙여보는 것과 넓은 면을 붙이는 건 또 다른 세계였다. 레이스 구석구석 칠이 과하게 차지 않아야 칠이 울지 않는다는 것도 그 때 알게 된 사실이다. '결'을 살리는 것이 그 작업의 주요 포인트 이다 보니 결이 드러남에 한치의 티가 오르지 않게 사려 깊게 작업 했어야 했다. 틈바구니에 지나치게 칠이 차오르면 울기도 울지만 결이 섬세하게 살아나지 못했다. 그러니 붓은 칠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칠을 쓸어내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칠을 얇게 올려야 하다 보니, 칠해야 하는 수도 더 늘어난다. 한번 채인 칠은 걷어내는 것이 더 큰 일이므로 능숙해질 때까지는 그 과정에서 신경을 곤두세워 작업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연구의 시간은 한 기물을 완성해 냈다.


처음의 연구는 매 순간 시행착오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어마어마 했다. 거기에 한번의 실수는 아버지는 그것 봐라 안되지 않냐의 비난과 함께 해야 했기 때문에 더 오랜 기간 걸렸어야 했다. 한번의 성공 뒤는 조금은 더 수월 했다. 더 다양한 레이스를 써보며 조금 더 섬세한, 조금 더 눈에 띄는 조금 더 아름다운 패턴들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 중 한 2종류의 패턴, 3점이 V&A 의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V&A 의 소장이 결정 되었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서 체류할 때, 비로소 아버지께 진정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녀석이 내가 하라는대로 나전만 했으면,
함께 V&A에 소장 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 한마디의 말에, 그 간의 불확실함과, 두려움과, 서러움과 원망의 감정이 모두 녹아내려 눈물을 펑펑 쏟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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