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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mi OH Aug 14. 2024

두 개의 상자

배움의 에피소드2

배움은 생각보다 규정되어 있지 않다.

잘 가르치면 잘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지만, 잘 가르친다고 꼭 잘 배우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어설피 가르친다고 어설피 배우는 것은 아니다.


초보스승과 초보제자가 만나,  정해져 있는 커리큘럼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눈앞의 것들을 해결해갔다.

가르쳐 달라고 말을 하는 제자와 배우고 싶은 것을 물어봐라 하는 스승의 치열한 대결.  

그러나 돌아가는 꼴 을 보아하니 시간이 무한정으로 소모 되겠다고 아버지께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루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의 보석함 나무상자 두 개를 보여주셨다.

그리곤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셨다.

그 해 원주에서 개최하는 옻칠공예대전에 출품할 것.


입상을 하고 안 하고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목표를 두고 그 시간내에 완성하자고 하셨다.


처음 내가 해야 할 일은 디자인 하기.

함의 사이즈를 따서 청사진을 그려내어 디자인을 먼저 해 보라고 하셨다.

사이즈 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지만, 디자인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사람낙서를 좋아했던 나는 사람을 끄적여 보기도 했다. 그 소재는 너무 낯서니, 꽃을 그려봐라 하셔서, 꽃 도안을 그려보기도 했고, 이 그림은 나전작업하면 둔탁하게 나온다고 하셔서 통으로 뭉뜽그려진 부분을 좀 흐트려 보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뒤치락 엎치락 종이와 연필을 들고 씨름을 하던날이 계속 되었다.

도안을 들고 가서, 수 차례 반려 되었고, "아빠는 내세계를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때의 그림들은 조악하고, 기이하기도 하고, 무의미한 소재이기도 했다.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시간과 자원과 에너지를 쓴다면 들인 것보다는 더 나은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내가 '그림' 이라고 그려갔던 것들은 '낙서' 에 불과 했고,

내 안에 상상의 것을 그려낼 능력은 부족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눈이 높은 아버지의 기준은 통과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해보면 통과되어선 안되었다 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며칠을 고전하고 있으니, 안 되겠다 생각하셨던 듯 싶다.

봄 즈음이었고, 공모전은 그 해 겨울이었으니.

더 이상 고민의 시간은 계속 되어선 안 되었다.


그 반려의 시간이 무의미 했던 것 만은 아니다.

낙서같은 도안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문양인 "엮음무늬" 는 채택 되었다. "엮음무늬" 라는 것은 가는 기다란 선들을 서로 엮어 바구니 엮든 무늬를 엮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한 줄로 끊어서 선을 만드는 것이 심심할 수 있으니, 가는 라인과 굵은 라인 총 세 개의 라인으로 실로 엮어 내듯 나전을 엮어내보자 하셨다.


허나, 그것 만으로는 심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동백꽃을 간결하게 그려내어, 적절한 크기로 배치 해서 도안을 해서, 적절하게 배치해봐라, 하고 말씀 주셨다.


그리고 완성된 도안.

한참을 공을 들였는데, 이제 시작이라고?!?!


하나의 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5-10 개월 더 길게는 1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 되기도 한다.

도안이 끝나면 그제서야 시작할 수 있는 스타트라인에 선 것이다.

칠을 올리고 말리고 또 다시 올리고 다시 말리는 작업을 반복.

그 과정을 다 묘사하기엔 길고도 지리할 것이므로 과정을 모두 이야기 하기는 힘들겠지만,

아이 키우기에 비유해보면 좀 더 이해가 될 것이다.

매일 밥을 먹이고, 씻기고, 달래고, 예뻐해 준다.

그런데, 매일 새로워졌다! 크게 성장했다!! 그런 느낌.

전혀 없다.

 어제와 같이 밥을 먹이고, 씻기고, 달래고, 예뻐해주고

어제보다는 더 성장 했거니.

하며 그냥 매일을 키운다.

그러다가 압도적으로 뽀얗게 달라질 때는 있다.

아이도 그렇지 않은가. 매일매일 밥먹여 키울 때는 성장하고 있는지 마는지 생각할 틈도 없다가 어느 순간 눈에 띄는 순간들이 있다.

울면서 유치원 보내고, 힘겹게 졸업시키고,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초등학교 보내고, 뿌듯해 하며 졸업시키고, 새로 예쁘게 교복 맞춰서 중학교 보내고,  또 졸업시키고..


칠도 매일매일 올리고 올리다 보면, 칠살이 뽀얗게 올라가, 광 을 낼수 있는 단계가 있고, 나전을 붙여 반짝 빛을 낼 때가 있고, 나전과 바닥과의 유격을 차곡히 채워  칠기 다운 모양을 갖추기도 한다.  

매일이 다르진 않지만, 어느 순간 언제 이렇게 자랐지? 하게 된다.  


대추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품고 있다 말한 장석주 시인의 말처럼,

칠기도 눈물 몇 알, 땀방울 몇 알, 손길 몇 개  품고 있다.


오고가는 희노애락을 수 차례 겪고 나면  

자기의 시간을 품은 칠기는 완성된다.


봄을 품은 도안을 여름을 머금은 칠바닥 위에 얹는다.

그 해 칠바닥에 새겨진 여름은 뜨겁고 지리했다.


나전 전문이었던 아버지는 옻칠은 처음이셨다.

칠이 마르도록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것 조차도 시행착오였다.

어느 날은 너무 습이 없어서 끈덕거리게 칠이 마르지 않았다. 어떤 날은 습이 지나치게 많아서 옻이 타버리기도 했다.

밤새 마르지 못한 칠은 성질이 바뀌어, 더 이상 마르지 않는다. 타버린 칠은 정상적으로 마른 칠과는 다른 질감을 낸다.

마르지 못한 칠은 닦아내어야만 하고 타버린 칠은 갈아내어야 한다.

한겹의 칠은 하루의 시간인데, 조건을 맞추지 못해 마르지 못한다면, 하루만큼의 공력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칠을 올리고 갈고, 삼베를 붙이고 갈고, 삼베를 붙이고, 그 위에 또 칠을 올리고 갈고, 토회를 올리고 나면 또 갈아낸다.

토회라는 것은 건물의 시멘트가 건물의 살을 붙여 구조를 만들어 주듯, 칠기의 살을 통통하게 붙여 구조지어 주는 과정이다. 흙과 칠을 섞어 부피감을 만들어주는 과정으로 흙과 칠의 비율이 중요한데, 흙이 너무 많으면 단단함이 부족하고, 흙이 쩍쩍 갈라지고, 칠의 비율이 지나치면 모서리가 잘 세워지지 않는다.

인생에 중도가 중요하듯 재료의 장점을 극대화 해 줄 적정비율이 중요하다.

2-3평 정도 되는 작은방에 칠방을 벌였기에, 둘이 마주앉아 함을 한 세트씩 완성을 해가는데,  부딪히기는 어찌나 잘 부딪히는지.

열심히 모서리 날을 세워 갈아내고 있는데, 서로 함이 부딪혀 허무하게 이가 빠져 버린다.

그러면 2-3일 치의 일이 더 느는 것.


함의 모서리가 부딪혀 깨지듯, 서로의 감정의 날도 부딪혀 깨지기도 했다.  


서로 많은 감정을 참기도 했지만, 부딪혀 이 나간 마음을 안고 작업은 진행되었다.


칠에서만 고행이 이어졌을까.

나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질감을 내기 위해, 세줄의 선을 끊자는 결정은 단 1분만에 났지만, 그 결정이  이렇게 많은 시간동안 나의 승모근의 고통과, 빠질것 같은 뒷골의 고통을 안겨줄 줄은 몰랐다.

세 개의 라인이 나란히 한 줄인양 자리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붙였다 띠어냈다, 끊어내다가 똑 부러지기라도 하면 떼어내고 다시 붙였다.

특히 흑진주패는 성질머리가 고약해서, 힘을 잘 못 주기라도 하면 지가 부러지고 싶은 곳에 부러져, 재료가 낭비되기 일쑤엿다. 상대적으로 청패와 야광패는 순하게 말을 잘 따라줬던 것 같다.

재료의 성질을 자연스레 습득하며, 칼과 핀셋 두개의 무기를 가지고 나전으로 엮어내는 엮음무늬의 전장을 누볐다. 매일 승전보만 있진 않았을터. 유난히 손이 말 듣지 않는 날은 심술도 같이 올라왔다.

아버지께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 두셨던 것 같다.

방치 당하는 것 같아 슬몃 짜증이 나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두 장의 다른 색의 엮음무늬가 완성 되었고, 아버지께서 뚝딱 해내신 동백꽃도 완성되어 한 몸을 이뤄 칠바닥에 붙게 되었다.

 

가을이 되니,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처럼, 어느덧 몸집 붙고 나전 반짝한 함이 자리 하고 있었다.

가을쯤엔 마지막 완성도를 올리기 위해 애씀의 시간이었다.

동백꽃과 엮음무늬 사이에 알알이 칠가루를 입혔다.

색색의 칠가루를 입혀서, 잔잔하게 꽃봉오리와 엮음무늬 사이에 색의 보색도 주었다.

이 과정의 고통과 초조함도 있었지만, 말로 다 표현하진 않겠다.


두 개의 상자를 완성 시키며 봄날을, 여름날을 그리고 가을날을 알토란 같이 보내며

나는 그렇게 그 해를 모두 상자 안에 소담히 담았다.


그 상자는 나의 커리큘럼이자 나의 스승님이자 나의 스물 몇살의 한 해였다.

나의 한해를 앗아가신 애물단지이자 고군분투를 오롯이 받아주신 스승님을 무탈하게 완성해 내었고

그 해에 특선이라는 결과와, 그 이듬해를 한 해 더 견딜수 있는 동력을 얻어냈다.


기쁘게도 그 상자는 스무 해 조금 덜 된 내년에 한 고등 교과서에 실린다고 한다.

아빠와의 아웅다웅 동고동락이 그렇게 역사의 한 구석을  장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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