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위눌림
한글을 읽을 수 있기 시작했을 때부터 귀신책에 골몰했다. 국내의 각종 토종 귀신 이야기부터 당장 나에게도 일어날 일인 것만 같은 도시괴담까지. 겁이 없는 성격이라서 그랬냐고 하면 오히려 정반대다. 나는 그런 쪽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고, 그래서 겁도 더 많았다. 두려움은 상상력에서 오는 거니까. 공포 영화를 볼 때 두려움은 손으로 눈을 가리게 했지만, 호기심이라는 감정은 그 손가락 사이를 슬그머니 벌리게 만들었다. 무서워 피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재미있어 지켜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 그런 시간들 때문이었을까.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더 이상 귀신책같은 건 보지 않게 되었지만 그 시절의 귀신에 대한 상상력과 두려움은 마음속 한 켠에 차곡차곡 쌓여 새로운 일종의 증상을 발현시켰다.
혼자 잔다.
어둡다.
TV를 끈다.
대학교 2학년 말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증상이 찾아왔다. 증상이라기보단 손님이라고 해야 할까. 위의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밤엔 어김없이 내 곁에 누군가 찾아왔다. 주로 사람의 형태나 목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몸을 보이지 않는 줄로 꽁꽁 묶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가위눌림이었다.
처음 겪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횟수가 쌓이면서 어느 정도 적응은 되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감각과 귓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한 공포감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여자 혹은 남자이기도 한 그 사람은 어떤 날엔 내 귀에 바싹 붙어 소리를 지르거나, 깔깔 웃거나, 대단히 반가운 말투로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분을 만나지 않으려면 세 가지 취침 환경 중 하나를 피해야만 했다. 자취생이라 혼자 자는 건 어쩔 수 없으니, 형광등이나 TV 둘 중 하나는 켜놓고 자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취침 패턴은 자연스레 만성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숱한 밤을 뒤척이며 수도 없이 되뇌어본 의문이 있다. 가위눌림이 시작된 게 왜 하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부터일까. 나는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며 쌓인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굳이 따지자면 원망에 조금 더 가까웠다. 술 안 마시고 엄마와 싸우지 않는 아빠를 둔 친구들이 늘 부러웠으니까. 가위눌림의 시작점에 대한 의문은 늘 그렇듯 미스터리인 채로 끝나곤 하지만, 가제트 형사와 유사한 남자 목소리에 시달리다 겨우 풀려난 어느 밤, 문득 내가 다섯 살 때의 사건이 떠올랐다.
처음 와본 놀이터에서 미아가 되었던 날.
동네 아이들을 따라 제법 먼 곳까지 걸어갔고, 거기서 아파트에 지어진 놀이터를 발견했다. 그네와 미끄럼틀을 신나게 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같이 온 아이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황했고, 아마도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것이고, 그리하여 다섯 살 아이답게 그저 주저앉아 울었다. 지나다니는 어른들이 집이 어디냐 묻고 데려다줄 법도 했는데, 충격적이게도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주변 어른들은 나를 본체만체하고 지나갔다. 요즘 같은 시대라면 몰라도 무려 80년대에 길 잃은 아이에게 그토록 무심한 어른들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여하튼 나는 아무리 울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자 혼자 집을 찾아가겠답시고 터벅터벅 걸었다. 하지만 걸을수록 눈에 보이는 건 더더욱 낯선 풍경뿐. 엉엉 울며 그대로 뒤돌아 왔던 길을 똑바로 걸어와 놀이터까지 돌아왔다.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위기감에 정신을 좀 차렸던 건지 다행히 있던 곳까지는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울고 있었을까. 아빠가 자전거 페달을 허겁지겁 밟아가며 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와 함께 뛰어갔던 아이들이 동네로 돌아오는데 내가 그 무리에서 보이지 않자, 아빠가 아이들에게 어디에 다녀왔냐 물어 나를 찾으러 왔던 것이다. 그 이후의 상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는 보통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밀려오는 안도감에 더 크게 울었던 것 같다. 세월에 바래져 드문드문 끊긴 필름 속에 한 가지 기억나는 장면은, 아빠의 등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해질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tv를 음소거로 켜놓은 채 뜬 눈으로 홀로 누운 밤, 나는 왜 이 사건이 떠올랐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세상이 나에겐 홀로 남겨진 낯선 놀이터 같은 곳이었을까. 이제는 홀로 울고 있어도 자전거 타고 와줄 사람이 없음을 내 무의식이 알아챈 걸까. 혹은 내가 읽었던 책에서 내 마음 깊은 구석으로 자릴 옮겨온 고약한 귀신이, 더 이상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진 걸 알고 마음껏 괴롭히러 온 걸까.
지금의 나는 과연 다섯 살 아이에서 더 자라긴 한 걸까.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던 가위눌림은 아주 의외의 방법으로 고쳐졌다. 고양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자 혼자(는 아니고 고양이가 옆에 누워있었지만) 자도, 어두워도, tv를 꺼도 그 혹은 그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집에 침입하려는 귀신이 고양이와 눈 마주치면 부리나케 도망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비슷한 이유로 고양이가 영물이라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었고, 영물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고양이가 좋았다. 내 옆에서 몸을 돌돌 말고자는 그 부드러운 생명체는 어떤 가드보다도 든든했다. 그토록 귀신을 무서워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귀신스러운(?) 방식의 믿음으로 공포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 사랑스러운 영물은 13년간 나의 밤을 지키다 무지개별로 여행을 떠났지만, 지금은 고양이 대신 남편과 두 아이가 있어 좀처럼 혼자 잘 일이 없기에 가위도 잘 눌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거실 소파에서 혼곤하게 잠든 밤, 몸이 점점 굳어가는 그 익숙한 느낌을 가끔, 아주 가끔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 이젠 당황하지 않고 새끼손가락에 감각을 집중하며 끝부분부터 움직임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자전거 탄 아빠와 파란 눈의 고양이를 떠올린다.
이윽고 편안히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