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상처를 직면하다
작은 무관심과 이기심이 닿은 자리에는 아픔이 남는다. 이미 남아버린 아픔은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출처: 오늘도 냥냥냥, '따끔따끔')
우연히 본 저 글귀가 쿵하고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그 울림에 애써 내 마음에 덧발라 놓았던 것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균열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작은 균열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덧발라 놓았던 것들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커져서 그 아래 숨겨두었던 상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스멀스멀 어두운 기운이 그 갈라진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드러내도 나는 계속 모르는 척하며 지내왔다. 스스로 언젠가는 그것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음에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마주하기를 꺼려왔다.
재작년 11월,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예견되었던 '이별'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날, 내 스스로도 이미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기에 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2월 '이별'이란 것을 확정 지었을 때, 아프지 않은 내 마음을 보며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반복된 무관심과 방임으로 습득하게 된 무뎌진 마음 덕분에 상처를 덜 받았다고, 그리고 이제는 내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돌보게 될 줄 알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나는 지난 2년간 수없이 받았던 생채기들을 그저 임시방편으로 덧발라놓고 외면해 왔던 것뿐이었다. 작은 무관심과 이기심에도 마음은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데 2년여간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왔던 그 관계에 내가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1년의 휴식기를 거치고 만났던 그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적으로는 분명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선배였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딱히 어른스럽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았으며, 나와 함께 있을 때 만큼은 나에게 신경을 좀 써 달라는 말에 자신의 장난감을 뺏으려 한다며 화를 내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약속 시간을 거의 지킨 적이 없었다. 나와 만나기로 한 날, 12시쯤 점심 먹고 출발한다고 하고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않은 채 차로 30분 걸리는 거리에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나타나고는 했다. 때로는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고 잠수를 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차라리 나에게 미리 주말에는 쉬고 싶다거나, 다른 약속이 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해 주면 나도 나름 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초반에는 그 때문에 싸워도 보고, 진지하게 얘기도 해 보았지만 그는 '내가 너한테 못한 게 뭐가 있냐'고 화를 내거나 '내가 다 잘못했다'는 이야기만 하면서 어물쩍 무마하려고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스스로도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젠가 그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그저 내가 적응하면 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사건을 계기로 그는 내 시간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나는 그가 나의 시간을, 나의 일을,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깨달아갔고, 나는 이 관계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한 번 들기 시작한 그 회의감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여태껏 주말에 잠수를 탄 것은 나 모르게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그런 것이었고, 나에게는 피곤해서 집에서 잤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 나는 조용히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늘 내가 먼저 하던 연락의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고, 그는 하루, 이틀을 넘어서 일주일, 열흘, 보름이 넘는 동안 내가 연락을 하지 않아도 먼저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 않았다. 결국 11월에 했던 전화통화를 마지막으로, 2014년이 끝나는 날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기점으로 삼아 나는 우리의 관계를 이별로 받아들였다. 솔직히 그 기간 동안 그가 만약 한 발짝이라도 먼저 나와 준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관계를 끌어나가리라 마음먹었었는데, 1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그가 먼저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이런 상황들을 알게 된 내 지인들은 나보다 더 화를 냈고, 더 아파했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다고, 이미 마음이 많이 떠난 상태기 때문에 아프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참 나한테 못할 짓을 한 것이다. 그 관계로 인해 받은 상처를 보듬지 않고, 주변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마음에 난 상처에 껍질을 덧발라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 상처들을 보듬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덧붙여 놓은 것들을 떼어내는 순간 밀려들 고통이 두려워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떼어낼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을 떼어내는 것도, 그 상처들을 보듬는 것도 내 스스로 해야 할 일임을, 그리고 그것을 직면하고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내 외로움을 직면하는 가장 마지막 과정이 되리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 상처들 깊숙이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해야 내가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 천천히 하나씩 되짚어 나가며 그 상처들을 치유해보려고 한다.
언젠가 만나게 될 또 다른 관계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