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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믄 Feb 02. 2022

내게도 아빠가 있었던가요?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반지가 있다. 목걸이가 아니라 반지. 반지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왼쪽 손 세 번째 손가락이었다. 하루 열몇 시간을 앉아서 일하다 보면 손발이 퉁퉁 부어서, 밤 어느쯤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책상 위에 올려두어야 했다. 가족끼리 맞춘 거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 그냥 매일 차고 있는 목걸이에 걸어두기로 했다. 반지가 손가락 사이에 있을 때나 혹은 목덜미 어느 쯤에 있을 때나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했다. "그거 커플링이에요?" 네 번째 손가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같은 질문을 하다니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맞춰 나도 자동응답기처럼 반사적으로 같은 대답을 했다.


나: 아뇨! 이건 패밀리링이에요.

모든 사람들: 와, 너무 귀엽다. 온 가족이 다 같이 맞춘 거예요?

나: 네! 아빠만 빼구요.

모든 사람들: 헉.. 아빠는 왜 빼요? 서운하시겠다.

나: 그냥요!


그냥요! 라는 편리한 대답엔 나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다. 부모님이 고등학교 때 이혼하셔서 안 보고 산지 꽤 됐거든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실 나에겐 아무에게나 말해도 상관없는 이야기긴 하다. 이런 게 부끄럽다거나 치부라고 생각할 나이는 지났으니까. 이십 대 후반쯤 되니 주변에 아빠 없는 사람은 많았다. 다만 저런 선의의 질문을 한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얘기하지 않았을 뿐. 미국 영화라면 "Oh.. I'm sorry." 같은 대사가 나왔을 법한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빠만 빼구요'라는 말을 하지 않기에는 양심에 찔렸다. 모두가 자연히 엄마 아빠가 있는 정상가족을 떠올릴 테니, 괜히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끼는 건 싫었다.


가끔은 내가 아빠가 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친구들이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도 아빠와 살았던 시절을 떠올린다. 학교   수프를 끓여주던 기억,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때렸던 기억, 가족 동반 모임에서 사람 좋게 웃던 기억... 단편적인 기억들은 둥둥 떠다니는데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종특  하나가 웬만한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는 금붕어 같은 기억력이기도 하고, 이혼이라는 이벤트가 중학교~고등학교 시절을 걸쳐 일어나 벌써  년도 넘게 지난 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간혹, 이젠 떠올리려고 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아빠라는 존재가 선명해질 때가 있다.


편입하기 전엔 경영학 복수전공을 했다. 특히 광고론이란 수업을 열심히 들었는데, 팀플과 발표가 무엇보다 중요한 수업이었다. 나와 함께하게 된 팀원들은 휘발되어버린 기억 속에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한 보험사에서 하는 마케팅 대외활동에 매진했는데, 그 활동의 꽃이라고 불렸던 세미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루에 서너 시간은 잤을까? 매일이 도망가고 싶은 날이었다. 기다랗게 쌓인 To-do 리스트, 도움 되지 않는 팀원들, 피피티에 수두룩하게 붙은 노란색 피드백 딱지, 울고 싶었는데 울 시간마저 없어 울 수 없던 날들이었다.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계속 생각하다 보면 머리 어디 한 구석에서 "너 아빠처럼 되고 싶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는 한껏 비장한 표정과 결연한 의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회피형 인간을 그렇게도 싫어하는 건 아마 아빠 때문일 거다. 나에게 있어 아빤 지독한 회피형 인간, 비겁하게 도망간 사람이다. 엄마와 아빠는 중학생인 나와 아마도 초등학생이었을 동생을 앞에 앉혀두곤 둘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으며, 우리는 아빠가 키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싫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그렇구나, 아빠랑 살게 됐구나. 동생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난 남몰래 엄마를 안타까워했으므로 우리가 없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사하던 날, 아빠가 아닌 엄마를 따라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엄마를 위한 마음과 별개로 엄마랑 살고 싶었던 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게 아빠가 아무 말 없이 잠수를 탄 결과였다는 건 몇 년이 지난 후에나 알았다.


가끔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어떤 면에선 엄청나게 무책임하면서도, 또 한 편으론 엄청나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 나는 무책임하게 술을 마신다. 내일 어떤 일이 예정되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는 현재의 술자리와 더 마시고 싶은 내 기분만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는 집착적으로 일한다. 남의 돈 1,000원이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기반으로 한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가끔 신입사원이나, 인턴들이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일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하는 건데요? 하고 만다. 말을 아낀다기보다는 이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렇다. 나의 무책임한 부분은 아빠에게서 왔겠지, 그리고 책임감 부분은 엄마에게서 왔을 거다. 그 책임감이 그냥 하는 일이 된 건, '너 그러다 네 안의 아빠가 튀어나온다'는 경종 때문일 테고.


그래서인지 나의 이상형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 구남친의 가장 사랑했던 부분도 바로 그런 면이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도 규율과 규칙을 성실히 이행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가지를 정리하고, 주말엔 가족과 장을 보러 가고, 절대 날 두고 도망가지 않을 사람. 아빠는 정말 내 인생에 없던 사람 같은데도 쥐 죽은 듯 몰래 숨어들어선 반면교사로서 존재감을 키운다. 그렇다고 해서 내 본질을 바꿀 수도 없다는 걸 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일도 무책임과 책임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내 안의 회피형 인간을 쥐어박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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