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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하기 Apr 16. 2024

'화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다 2

내 안의 내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


'기록하자.'








모든 것을 잠시 쉬기로 마음 먹고 나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일시적인 변화와 다시 돌아온 현실 속 예전의 내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버둥대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분명 변화는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예전의 내 모습과 변화된 모습과의 괴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 원하는만큼의 변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변화가 있다고해서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긍정적인 변화들이 힘이 되주었지만 여전히 그 힘은 약했다.     

저항도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점점 원하던 결과와 원치않던 결과가 반복되는 시기가 더 좁아지기 시작했음은 분명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여전히 막연했지만 분명 신호였다.

아직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잠시 쉬기로 마음먹었을 때 불현듯                


'기록하자'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끔 일기를 쓸 때가 있었지만, 몇달에 한번정도였다.      

그즈음 접하는 모든 것이 '기록'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페이지를 채우는 것이 힘들었다.     


페이지를 채우는 데 급급한 일기쓰기가 이어지던 어느 날,                

'이런 걸 하는 진짜 이유가 뭐지? 난 뭘 위해 이런 걸 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전 일기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기 속 내 마음은 그야말로 어느 미친 사람이 널뛰는 것마냥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나를 몰아세우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나와 화해하겠다고 해놓고 조금의 변화에 들떠 또 다시 나를 외면한채 앞만보고 달리고 있었다.     

나를 돌보겠다 다짐해 놓고 목표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조급함과 불안함을 덮으려 매일매일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더 힘을 빼보기로 했다.               

페이지 수를 정하지 않고, 쓰고 싶은만큼만 쓰기로 했다.     

생각이 많은 날은 3페이지든 4페이지든 썼다.     

생각이 없는 날은 반페이지도 겨우 채울 수 있었다.         

      

시간을 정해놓지 않기로 했다.     

수 개월동안 아침을 고집하던 나는 아침이던 저녁이던 혹은 오후던 쓰고 싶을 때 쓰기로 했다.     

그때그때 생각을 비우고 내 마음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쓰기로 했다.     

일기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자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초반에 들여놓은 습관 탓에 한페이지를 못채우는 날에는 마음이 불편하지만,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은 염려와 걱정이 줄어든 날이란 반증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한두달에 한번 그간 써 놓은 일기들을 훑어볼 때가 있다.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많은 날에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두서없이 써놓기도 했다.

그 중 일부는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고 잊고 있기도 했다.

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왜 안 썼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대부분 외부 일정이 많아 바쁜 날이거나 술을 마신 다음날이었다.


'아, 아직 나는 외부 상황에 휘둘리고 있구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한없이 늘어지는 하루를 보내거나 상황에 휘둘리는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앞으로는 이런 상황에 굴하지 말고 더 열심히 일기를 써야지!'

마음을 먹고 일기장을 덮곤 했다.


한권한권 늘어가는 일기장이 뭔가 뿌듯해져 왔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아 다시 일기쓰는 것에 소홀해 질 때쯤,

흘러드는 생각을 정리하고 내보내기 위해 쓰던 일기와     

나를 돌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시작한 독서는 어느새               

"자기 관리 잘하는 사람"     

이라는 타이틀로 남들에게 비춰지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음을 깨달았다.





'아..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과 다시금 마음이 방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럴때면 밖으로 나가 무작정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걷기 어려운 날에는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해 보기도 했다.


'아, 어떤 외부 상황이나 자극이 있어도 내가 믿고 하고자 하는 것을 꾸준히 지속해가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구나. 지속해 나가기 위한 근력을 기르는 중이구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은 짧게나마 명상에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일기를 쓰며 생각을 더하거나 빼던 나는 그때부터 떠오르는 생각과 느껴지는 감정들을 더 솔직하게 적기 시작했다.

원치 않은 상황을 마주할 때면

 '왜 이런 일이 생긴거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 상황 자체를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이 상황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이지?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답을 찾으려 애쓰지는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마주하는 상황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은.


기대했던 상황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마주할 때

의도했던 바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때

상대의 무례한 언동에 마음이 상할 때

그럴 때마다 상황이나 상대를 탓하기보다 이것이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울 것이 있다는 신호, 알아차리라는 신호말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신호인지, 그리고 그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명상을 해 보더라도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다니고 감정들이 솟구쳐서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떠다니던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고, 그렇게 커진 생각에 추측과 판단이 더해지면 감정은 더 격해지기도 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 어려웠다.


그즈음 예전에 읽은 있던 한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시기에 눈에 띈 책이 몇권 더 있었기에 그 책들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내가 다스려야 하는 마음은 결국 내 기억 속의 감정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걸 깨닫기 위해 그렇게도 멀리 돌아돌아 온 것 같았다.

스스로 깨달아야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내면아이치유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무의식정화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이 단어들의 의미에 매달려도 봤다.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해야 더 제대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뭐고 의식은 뭐지?

잠재의식, 현재의식, 표면의식은 또 뭐야?

정화?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기억을 지우고 제거하라고?

지우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제거하란말야?

현재에 집중하라고? 현존하라고?

자꾸만 드는 이 생각들은?

마음과 다른 이 행동들은?

이걸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하지?


이런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그래서 의미를 찾아 사전과 책을 들춰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내 마음은 하루는 좋았다가 하루는 안 좋았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반복에 지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예전에 배웠던 것들, 읽었던 책속의 문구들, 들었던 말들이 하나로 모여들고, 어디서나 툭툭 튀어나오는 일들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기억을 제거하라는 것은 결국 그 기억을 떠올릴 때 내 감정을 바꾸라는 거구나. 과거 기억을 떠올렸을 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을 때, 그 때가 비로소 그 기억에 대해 완전히 정화된 것이고, 치유된 것이구나.

내가 배워야하는 건 이거였어.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이 현재와 미래에 반복되지 않도록 흘려보내는 것.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현재에 집중할 수 있을테니까'

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상황을 마주한다.

그 안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담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 기억들은 정화의 대상이었다.


막연하게 내가 하려던 '화해'는 결국 '기억 속 감정의 정화'였고, 그것이 치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또 다른 기억들이 내 무의식에 저장될 것이다.

그때마다 정화하고 치유하는 것이 결국 화해였다.


내가 나와 화해한다는 것은 이런 기억들이 튀어나올 때

'왜 이런게 생각나는거야!! 없어져버려!!'

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

'이 기억을 정화하라고 알려줘서 고마워. 그 동안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해서 미안해.'

라고 내 안의 아이를 달래고 돌보는 것을 의미했다.


여전히 나는 나와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숙해지는 중이다.

여전히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휘둘리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몸이나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면 노트를 꺼내 그 마음을 그대로 옮겨적거나 무작정 걷거나 가만히 앉아 그 상황에 반응하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괜찮아'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직 괜찮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아, 지금 나 힘들구나. 아프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기만 할 뿐이다.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을 때도

'아, 아직도 이 기억들을 갖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아팠구나. 그걸 몰랐구나. 미안해. 지금이라도 알려줘서 고마워. 이제 이 기억들을 흘려보내주자. 고마워. 미안해.'

라고 되뇌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마음 속에 또 다른 내 모습을 그려놓고 가만히 옆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토라지고 버거워하는 또 다른 내가 하소연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혹은 앉아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면 신기하게 몸의 통증이나 불편감, 솟구치던 감정들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기하게 엉켜있던 상황이 조금씩 풀려가기도 한다.


'이게 맞다는 거지? 그걸 알려주려는거지? 고마워. 알려줘서'


그렇게 매 순간 나에게 미안하다, 용서해달라, 고맙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되뇌이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화해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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