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vre Aug 20. 2017

자기만의 방

호텔, B&B 결국 내게 필요한 건


영국 런던 캔징턴 인근의 오래된 방을 앤티크 가구와 패브릭으로 꾸민 디자인 호텔 Sixteen. 잘 계산된 스타일링이 편리함과 아늑함 모두 만족시킨다.


여행할 때 가장 설레는 순간은
아침 햇살이 들 때다.
여행은 지금, 어바웃 타임이다.




일찌감치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저서 A room of one’s own(역: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그녀는 여성들에게, 특히 글을 쓰려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 정도의 돈이라고 말이다. 당시 그녀에게 이 두 가지 조건은 현실적인 자유를 뜻했다. 오래 모셨던 나의 직장 상사이자 한 십 년 뜨겁고 슬픈 순간에 ‘좋아요’를 지긋이 눌러준 인생 선배는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한 달 간 배낭을 메고 영국으로 떠났다. 버지니아 울프의 단출한 책 한 권은 여행을 마치고 선배가 내게 선물해 준 책이었다.(물론 영어 원서..흰색 종이 재질은 나의 취향저격) 두 해가 지나 나 역시 소속 없이 떠나온 이국의 방에서 어렴풋이 그 뜻을 읽어본다. 세월이 담긴 책상과 전등,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방, 약간의 햇빛. 글이 써진다. 지금 이렇게. 이 글은 연필로 쓴 내 노트를 옮긴 것이다. 사설이 길다. 소속이 없으면 어떤가. 자기만의 방, 지갑 속 약간의 돈. 내게 필요한 건 많은 물건이 아니었다.


창 하나가 주는 기쁨. Airbnb로 예약한 런던 풀럼(Fulham) 지역 개인실이다.



눈을 뜬 참이었다.
시간이 멈추는 기시감이 들었다.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감 덕이다.





숙소의 위치는 경험의 농도를 좌우한다. 골목길에서 로컬의 삶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내가 머물렀던 런던 오크버리 로드와 로즈베리 로드와 집 풍경.






Ciao!

차오와 차우 중간 발음으로 읽는다. 이탈리아 말로 영어로 Hello쯤 된다. 근데 이 단어에는 How are you?가 포함된 느낌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손님맞이는 큰 웃음과 포옹이다. 여러모로 호텔이 편하긴 하지만, 때론 오랜 여행의 고단함을 치유하는 누군가의 환대가 더 필요하다. 어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어루만져 주는 따스한 온정이 절실하다. 시린 마음 안고 떠나온 여행길. 일정을 구성했다. 첫 여행지였던 이탈리아에선 호텔과 B&B를 오갔다. 지금 나는 이탈리아에서 보낸 뜨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영국 상공에 막 접근하던 참이다. 이번 여행 중 10곳의 숙소에 머물렀다. 나만의 방이 10개. 집집이 다른 체험을 했고 공간마다 행복한 기억을 담았다.

사람은 방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일단 잔다. 푹 잘. 함께 또는 혼자. 이때, 잘 일어나 활동하는 것이 포인트. 나만의 여행이 2주쯤 지나자 평온이 찾아왔다. 가끔 생사 안부를 묻는 절친은 내게서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스트레스로 일희일비하던 내게서 평온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매일 똑같은 시각에 움직이는 플랜맨의 생활을 내려두고 아무 시간에나 신발을 벗어던지고 욕조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흰 수건으로 툴툴 머리를 말린다. 그리곤 침대로 스며들어 책을 집어 든다. 이 모든 행동은 평범한 일이다. 몸이 노곤해지며 스르륵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여행이 길어지니 향수병이 문득 날 두드린다. 그래서 호텔도 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방으로 다시 골랐다.


조금 어렵게 살기로 다짐한 참이다.
누구의 삶에나 고개는 있다.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니, 나만의 방에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나의 사회에 대한 생각이 연결된다. 한국에서 마흔 즈음 회사 생활을 하는 이들이 겪는 가장 불안한 감정은 ‘곧 내가 잘릴 것 같다’가 아닐까 싶다.우리 사회는 모범생이 사회생활의 승리자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알고 보면 모범생은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일지 모른다. 본인이 모범생이라 여기는 이들은 과도한 경쟁에서 오롯이 성공했다 으스대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기만에 걸린  ‘열심히 문화’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모범 가장이 실직하면 어찌 될까. 우선 회사, 사회, 국가 모두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가족은 그간 고생한 이의 노고를 인정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혜택이 줄었음을 먼저 비관한다. 사표를 낸 삼십 대 싱글. 옆자리 모범 가장들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내 명의의 집도 없고 통장 잔고도 그다지 풍요롭지 않다. 날 부러워한 모범 가장들에 비해 가진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 희안하게 불안하지 않다. 마음만 부자다.(아, 저 욜로족 아닙니다. 그것도 미래 창창한 20대에나 해 보는 겁니다. 곧 경제 활동 재개 예정!) 나도 한때 모범생 소리를 듣고 싶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칭찬이 좋았다. 공부만 하면 됐다. 열심히 구직하고 취직해 나=회사 동일시 주인의식을 바탕으로 열심히 일했다. 사회생활 7년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상사와의 관계에 트러블이 잦아졌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왜? 처음엔 그 사람이 이상한 이라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배우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장애였는 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안나오는 내용이니까 말이다. 지식대로 살 순 없다. 그래서 경험과 생각은 중요하다. 서른이 넘어서야 뒤늦게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고 버무려져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인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을 때 부드럽게 관계를 풀어내는 법을 체득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늘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가까운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편안히 잠들고. 그리고 상대를 조금만 기다려주면 된다는 작은 사실. 이것이면 된다는 걸. 참 늦게 깨우쳤다.



런던에서 머물며 매일 아침 산책에 나섰다. 그저 표지판이나 함께 사는 이들과 공유하는 삶에 대한 묘사를 발견했다.
베로나에서 머물렀던 로라의 집. 엄마처럼 차를 끓여준 집 주인이었다.


가족을 떠나 혼자 하는 여행.
여행지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만나보길.



아, 혼자 방에 있으니 잠재된 의식 속에 무거운 이야기들이 튀어 나온다. 자, 심플하게 살자. 심연의 무거운 이야기를 접고 다시 방 이야기로. 나만의 방에 필요한 물건은 간단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화장실. B&B를 알아보면서 집 주인과 공유하는 공간과 개인실이 있는 공간을 선호한다면 화장실을 Share할 것인지만 선택하면 예약이 끝난다. 여행지 로컬의 삶을 짧게 엿보는 B&B 숙박. 내가 고르는 기준을 소개한다. 첫째, 가족이 사는 집을 고른다. 자식을 키워 독립시키고 소일거리로 민박하듯 운영하는 집이면 더 좋다. 개인적으론 집 주인이 ‘살림의 신’이면 더 좋다. 고급 호텔에 준하는 빳빳한 침구와 근사한 현지 가정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의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집안 구조면 더 좋다. 집 주인과 나의 생리현상이 동일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경험이 있는 호스트를 고른다. 집 주인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려면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아주는 슈퍼 호스트(에어비앤비가 답변 빠르고 머물렀던 게스트의 신뢰도가 높은 호스트에게 부여하는 호칭)를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행 중 3명의 호스트를 만났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모두 나만의 수퍼 호스트! 였다.




붉은 도시 볼로냐에서 머문 마리아의 집. 마리아는 나와 페친이 되었다.







긴 여행은 변수의 연속이다.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저가항공사 easyjet의 오버부킹에 따른 정책으로 한국에서 계획했던 영국 에든버러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베니스 공항으로 보내진 나는 이틀 동안 성수기 공항의 부산스러움을 경험했다. 그 시각 나는 여행 지속 여부와 예약된 숙박 취소와 배고픔 문제 해결에 대한 걱정을 겨우 내려놓은 상태였다. 설상가상 런던 공항 활주로 문제로 모든 비행기가 결항 되면서 예상치 못한 이탈리아 일정이 추가됐다. 그리고 베니스에서 보낸 하루. 뒤엉킨 일정과 떨어진 입맛으로 잠시 마른 몸을 이끌고 한 치수쯤 커진 청바지의 허리 춤을 잡고 나만의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꿈을 되새길 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베니스로 나갔다. 언어 소통이 어렵다면 한인 게스트하우스도 괜찮다. 아래는 베니스에서 러블리한 날들을 보낼 수 있는 한인이 운영하는 로컬 숙박이다.이름은 앤티크 하우스.



무심코 구름을 지켜보는 망중한
나의 시간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되었다.




빗소리가 후두둑. 벨루노에서 머물렀던 농장 민박(farm stay) 다락 창문.


여행의 즐거움이란
무언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시간에
그 즐거움의 절반이 놓여있다.



빨간 머리 앤이 그랬다. "저는요. 무언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절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즐거움을 기다리는 동안의 기쁨은 틀림없이 나만의 것이니까요." 이는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된 캐나다 프린스 애드워드 섬으로 떠난 백영옥 작가가 중앙선데이에 수록된 여행 칼럼에 인용한 빨간 머리 앤의 대사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는 일은 여행 중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의 여행기를 통해 받았던 간접적인 느낌이 지금 나의 여행을 응원해주는 것처럼 힘이 난 까닭이다. 런던 풀럼(Fulham) 지역 벤의 아담한 집에 자기만의 방을 예약했을 때 내 정서는 빨간 머리 앤의 대사처럼 즐거웠다. 어렴풋이 내가 꿈꾸던 집이었다. Airbnb 집 주인 벤은 몇 주 간의 여행으로 조금 지친 날 위해 아침 일찍 우유를 데워 뜨거운 차를 끓여주었다. 영국인들은 상대를 살필 때  ‘차 한 잔이면 된다.’는 말로 모든 상황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위로를 건넨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우리 문화에도 어떤 상황이든 가족이 아닌 남에게도 위로가 되는 상징적인 리추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짧은 인생 경험으론 엄마의 집밥 말곤 남을 위한 위로의 표현이 딱히 없는 거 같다. 홀로 여행하며 무너지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때 어려움을 토로할 상대가 없다는 현실이다. 나에게 방을 내어준 집 주인에게 약간의 고생 담을 털어놓으며 가진 짧은 티타임은 지친 내 맘에 큰 힘이 되었다. 방으로 돌아와 비도 오고 그래서, 음악을 틀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긴 여행을 위해 타국 멀리 머물 방을 고르던 기억이 스친다. 잠시 멈춤. 여행의 시작을 돌아보는 순간, 설렘 재생. 지금 이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나만의 방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된 공간. 매일 아침 이 책상에서 글을 썼다.


작가의 이전글 단짠, 당신의 선택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