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인간이 두 달간 읽기만 했으니 개가 풀 뜯어먹은 꼴이다 할 수 있겠다. 제 먹을 것이 아닌 것을 먹어댄 탓에 소화도 안 되고 어설프게 먹은 것들은 내 영혼에 달가운 양분 한 숟가락이 돼주지도 못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독서반에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읽었다. 책 모서리는 하도 귀 접기를 해두어 두 배로 두툼해졌고 거의 모든 문장마다 밑줄을 치는 바람에 나중에는 밑줄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페이지마다 물음표들이 깨알같이 쏟아져 나와 해결은 고사하고 일일이 주워 담기도 벅찼는데 그나마 알게 된 사실 중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읽은 책 제목이 ‘파우스트 박사’라는 것 뿐이다.
대부분의 독서반 친구님들은 워낙 책을 오랫동안 읽은 분들이라 어려운 책도 너끈히 감당하시는 것 같았다. 오직 두 명, 얼마 전 내게서 독서반 새내기 이름표를 가져가신 선생님 한 분과 나, 둘이 서로를 불쌍히 여겼다.
대위법이니 화성학이니 하는 전문 음악 용어 앞에 엎어지고 루터의 종교개혁과 종교심리학 따위를 들으며 나자빠졌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도 구분 못하는 역사 무지랭이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대한 토마스 만의 고뇌를 쏟아부은 정수를 겁도 없이 맛보겠다고 덤볐으니 내 입에는 너무 썼다.
수업 마지막 날 소감을 한 마디씩 나누는 자리에서 독일 문학을 넘다 하마터면 찢어질 뻔한 내 가랑이의 안부를 전했더니 교수님께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한 학생이라며 내게 보인 따뜻한 눈빛이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다. 너무나 인자한 분이셨다.
읽는 데 지쳐 한동안 쓰기도 멈추었다. 그사이 일상은 태풍처럼 지나갔다. 세를 불리기도 하고 잃기도 하면서. 걸림돌처럼 일상 밖으로 불거진 몇몇 일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태풍의 눈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려고 애썼다.
흔히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말한다. 어느 축에도 들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굳이 분류를 하자면 나는 다상량에 속하는 편이다. 망상 구 할에 공상 일 할로 구성된 생각 덩어리를 저리 격을 높여주자니 낯 뜨겁기 짝이 없지만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을 바로 내보내지 않고 오래 내 안에 머무르게 하는 버릇이 있다. (평상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행태와 일맥상통이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여기저기 치여 대강이라도 모양을 갖춘 생각들을 글로 내보낸다. 나처럼 글 한편 쓰려면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치는 수고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생각을 수제비 반죽처럼 쉽게 뚝뚝 떼어내 글로 만드는 작가들의 솜씨는 마술 같다고나 할까.
대표적인 글쓰기 법인 다작은 좀 다른 의미로 어려운 부분이다. 그간 자신의 게으름을 숱하게 고백한 것으로 충분히 설명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왜 내 구역도 아닌 남의 영역에 와서 다독을 기웃거리고 있는가. 읽기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언젠가 혼자 일리아스를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창에 찔리고 칼에 베이고 전차에서 나동그라지고 말들이 쓰러지고 자욱한 흙먼지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들판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처참한 가운데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고향에 남은 가족들을 위해 시신을 화장해서 뼈만이라도 가져가자고 주장하는 이, 피범벅이 돼 일일이 분간하기 어려운 시신들을 물로 씻어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이, 시신을 수습하고 힘든 몸과 마음을 술과 음식으로 달래는 이들.
이 모든 행동은 미쳐 날뛰는 전쟁터 한 복판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한참 적어 내려가다 갑자기 인간성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걔가 걔라는 식의 설명은 유용하지 못했다. 나를 대입해보아도 주변 사람들을 대입해보아도 개성만 부각될 뿐 분명한 공통분모가 모호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성을 가진 동물?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이지? 어떤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일까? 하는 생각들이 줄줄이 꼬리를 물었다. 인문학을 알지 못했던 한 인간이 인문학의 문고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몇 년 뒤 우연히 지금의 독서반을 알게 되고 나는 그 문고리를 돌리고 인문학의 방문을 열어젖히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인간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색하다. 겨우 알아가는 중이라고 대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지난주 시작한 초급 영어 회화 수업 때 왓츠 유어 하비라는 마샤 티처의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reading and writing 이라고 답했다.
읽는 인간이 나아가 쓰는 인간이 된다고 한다. 읽기 위해 쓴다고도 하고 쓰기 위해 읽는다고도 한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알지 못하는 것은 적지 못하는 지독하게 융통성이 없는 인간이라서 고된 읽는 인간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무척 고되다.
드문 글 안부를 물어주는 고마운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