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낭만이 있다고?

by 하유미




풀이 죽은 남편은 술잔을 비우며 속을 털어냈다. 요즘처럼 통장을 스쳐간 월급의 흔적만을 구경할 뿐인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그 옛날 월급봉투란 게 실물로 존재했을 때는 그래도 쥐꼬리만 한 낭만이 있었다고 믿는 남편 같은 부류가 이해가 되는지. 따지고 보면 자신도 월급봉투를 실제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서 이제 사람을 넘어 AI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세상에서 남편의 마음은 자꾸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낮에 본사에서 내려 온 지시가 함께 일하는 협력업체에게는 소위 양아치 같은 짓이라 차마 양심이 그 짓을 허락하지 않아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며, 아직도 굳은 화석처럼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고 속으로 술을 들이킨다.

남편에게 술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다. 남편의 에너지원은 보편적 인간생명의 동력인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아니라 탄소2개, 수소6개, 산소1 개로 구성된 분자덩어리이다. 몸속에서 이 분자덩어리가 어떤 형이상학적인 화학작용을 일으켜 울트라 화합물을 만들어 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힘들었던 날이면 남편은 퇴근길에 꼭 주유소(집 앞 편의점)를 들른다.


사무실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다독였다고 하니 남편 모양새가 어지간히 짠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옆에서 야무지게 밥을 먹으며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끼어들었다.


“아빠가 일을 잘하나 보지? 그 사람들, 아빠가 혹시나 회사 그만 두면 자기들이 힘들어질까봐 그러는 거 아니야?”


술래가 얼음땡을 해준 듯 뭣도 모르고 한 아이 말에 남편 얼굴이 그제야 생기를 띄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여행프로그램을 보는데 꼭 대야처럼 생긴 베트남 전통 고깃배를 타고 소개를 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여행가는 노를 젓지 않는다. 덕분에 어부는 두 사람 몫의 노 젓기를 해야 한다.) 그 여행가의 입에서 낭만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뙤약볕 한 줌 피할 곳 없는 저 배를 타고 하루만 고기를 쫓아 노질을 해보면 낭만이란 말이 쑥 들어갈 거라며 침을 튀겼다. 애석하지만 나이 먹은만큼 닳은 나에게 일과 낭만은 물과 기름처럼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 반해 남편은 아직도 그것들을 번번히 같은 카테고리에 넣는 실수를 한다. 그러니 수십 년 직장 생활이 무색하게 자신의 정체성과 처세술 사이에서 여전히 고통을 받는다. 오직 위로를 기댈 것이라곤 울트라 화합물뿐이라고 믿으며.

학교만 다녀도 직장이란 곳이 의리나 양심 따위가 어울리는 곳이 아니란 걸 깨우치는 마당에 자꾸만 제 눈에 낭만의 콩깍지를 덮어쓰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남편이 제발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아이와 같은 통찰력으로 직장생활을 해나가기를 바라본다.


고통을 마취시키는 효능이 있는 탄소화합물 덕분인지 우문현답 같은 아이 말 덕분인지 저녁밥상에서 남편의 고민이 점점 휘발되고 있었다.


남편, 힘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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