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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May 19. 2023

계란 증정품으로 딸려 온 한능검 1급

무기력 극복기(2)



막상 천축국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열 알의 경전을 무사히 손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근두운을 타고 나는 듯했다. 다음날 아이는 비상사태의 밥상이 아니라 계란이 있는 평소의 아침을 먹고 등교했다. 계란 사 오기에 성공을 하고 나니 다른 일에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하루에 한 번 씻고, 옷을 갈아입고,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을 점점 늘려나갔다.


오전에 짧은 집안일을 마치고 뜨거운 차를 만들어 히터에 발을 올리고 즐겨보는 동영상을 틀었다. 요즘 한국사 강의에 푹 빠져있다. 고려시대 왕인지 조선시대 왕인지도 구분 못할 정도로 역사에 무지렁이였는데 우연히 보게 된 역사 강의에 매료돼 채널에 올라온 동영상을 아예 정주행 중이다. 뜨거운 물을 더 채우려고 시청을 잠시 멈추고 물을 끓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왕 강의를 주구장창 들을 바에야 한능검 시험이나 한 번 봐볼까?

뭐, 계란 사 오는 것도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었잖아.

곧바로 덜렁 한능검 교재를 주문했다.


교재는 생각보다 두툼했다. 시험 일정을 찾아보고 4월에 있는 64회에 응시하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짰다. 석 달 뒤라 시간은 넉넉했다. 당시 한창 근대 편 강의를 듣고 있던 터라 책의 목차대로 선사시대부터 공부하지 않고 호기롭게 근대부터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하고 3일째,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느낌이 왔다.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소요되었다. 교재가 100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루에 3강씩 해나가면 개념강의를 두 번 반복해서 듣고 4월에는 기출문제를 풀면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한 강을 듣고 읽고 필기하는데 2시간씩 걸렸다. 하루에 최소 6시간을 쏟아부어야 목표량을 달성할 수 있는 셈이다. 독서라 해봤자 이 책 찔끔 저책 찔끔 깨작대며 읽는 게 다였는데 이제 하루에 6시간씩 몰두해야 한다니.

그나마 강의가 재미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개념강의를 두 번째 반복해서 들을 때만 해도 기출문제 풀이 때는 뭐라도 조금 기억나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그 헛된 기대는 기출문제집 1강을 펴자마자 끝나버렸다. 빗살무늬 토기를 구석기인이 만들었는지 신석기인이 만들었는지, 고인돌이 청동기시대 유물인지 초기철기시대 유물인지조차 오리무중인걸 알고 나자, 그 뒤로 이어지는 100강에 걸친 유구한 역사 속 사건들의 연도와 수많은 인물과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선후관계들은 두 달이라는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은 한 달이면 충분하다는데 무려 두 배의 시간을 더 공부하고도 기억하는 게 없다는 사실에 공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동안 주말에는 태평하게 쉬었던 안이함을 꾸짖었다. 이제 주말이고 뭐고 밤낮이고 가릴 새 없이 쏟아부어야만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해서 저녁 밥상이 절로 차려지거나 식기들이 스스로 제 몸을 씻고 건조대에 드러눕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까딱하면 계란 파동이 또다시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는 죽을힘을 내서 계란을 사러 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름 일과표를 만들었다. 바쁠수록 더 기계적으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에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대충 하고 2시간 공부를 한다. 점심을 먹고 졸음과 싸워야 하겠기에 커피 한잔을 들이키며 2시간 공부를 한다. 그즈음 하교한 아이에게 간식을 주고 학원을 보내고 장 보러 나선다. 매일 한번 바깥공기를 쐬려는 목적이라 특별히 살 게 없으면 과자라도 한 봉지 사 온다. 저녁을 해 먹고 설거지거리를 세척기에 넣고 마지막으로 2시간을 공부하고 하루를 마친다.


겨우겨우 시험 바로 전날 기출문제집 100강을 완료했다. 그날 밤 인터넷으로 지난 시험 중  난이도가 높았다는 회차를 실제 시험시간에 맞춰 풀어보았다. 95점이 나왔다. 희망적이었다.



*시험장 에피소드-휴대폰 전원을 끄라는 시험 감독관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 휴대폰의 전원을 끄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의 세 배를 공부해야 남들만큼 결과를 만들어내는 머리를 가졌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됐다. 나이 탓 하지 않겠다. 머리 탓이다.


*심화1급 합격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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