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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May 20. 2023

트레드밀 전투

무기력 극복기(3)



장시간 고개를 숙여 책을 보니 가뜩이나 시원찮던 목이 탈이 났다. 마사지와 스트레칭을 하며 머리를 사방으로 뱅뱅 돌려봐도 좀체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남편이 앞서 허리, 목, 어깨 등 여러 군데 척추문제로 두 번이나 입원하고 시술하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있어서이다. 심할 때는 차라리 자기 팔을 잘라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지독한 통증 하며 그 용도가 죽어가던 사람도 소스라쳐 일으킬 목적이 아닐까 의심되는 주삿바늘을 떠올리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그날도 오전 공부를 하는 중에 목과 등이 불편해서 앉았다 일어서기를 열두 번도 더 하다가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 저수지 한 바퀴를 돌고 오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잠시 망설이는 중에 아파트 지하에 있는 스포츠 센터가 떠올랐다. 이사 온 지 3년째 나지만 먼발치서 구경만 해봤을 뿐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곳이다.


운동화를 챙겨 들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오전이라 그런지 각종 운동 기구들이 즐비한 곳에 운동하는 사람이라곤 달랑 세 명뿐이었다. 털털이에 올라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털고 있는 아주머니, 볼륨을 최대치로 키운 라디오를 틀어놓고 거꾸리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누가 봐도 여기 처음 온 티가 줄줄 나는 초짜 한 명.

다른 기구들은 사용법도 모르거니와 혼자 이용하는 자체가 위험할 수 있는 관계로 바로 트레드밀로 향했다. 오래전 나를 레그 프레스 머신에 깔아뭉갤 뻔했던 헬스 트레이너가 알려줬던 사용법이 다행히 기억이 났다. 전원과 시작, 버튼 2개만 누르면 된다고 했다. 트레드밀을 작동시키고 속도 6단계에서 걷기 시작했다.


사는 동안 단신이라서 불만인 점은 높은 데 손이 닿지 않는 불편함 말고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다리가 짧은 것은 (상하체 비율을 보면 다리를 잘못 만들어 붙인 것이 확실한) 여러모로 불편하고 불만이다. 평균 다리길이를 가진 사람에 맞춰 제작된 모든 기성복 바지는 평생 나를 우롱했다. 옷을 살 때마다 이렇게 잘라낼 거면 옷감 값을 빼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내 다리 길이에 맞는 바지를 입으려면 정작 웃돈(수선비)까지 지불해야 한다.


트레드밀 위에서 또 한 번 내 다리는 빛을 발했는데 6단계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며칠 뒤 헉헉대는 내 옆에서 같은 속도로 휴대폰을 만지며 편안히 걷는 사람을 보고 숙달의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나를 끊임없이 뱉어버리려는 트레드밀과 싸우다 20분 만에 백기를 들고 내려왔다. 체력도 그렇지만 심장이 버텨내지 못했다. 갓바위에 오르다 심장에 너무 무리가 와서 구토증이 가라앉지 않아 큰 낭패를 봤던 트라우마가 있어서 심장박동소리가 스테레오 스피커로 머리통을 쿵쾅 울려대자 겁이 나서 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를 쫓아버리고 나서야 조용해진 트레드밀을 등지고 서있으니 이번에는 땅바닥이 빙빙 돌며 나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이곳에서 내게 우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이 빠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어제 혼이 덜 난 탓인지 아침에 책을 펴기도 전부터 목이 아팠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트레드밀과 마주했다. 비장하게 계기판을 쳐다보며 오늘은 30분을 채우리라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그날뿐 아니라 일주일이 넘도록 30분을 버티지 못했다.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30분 가까이 무한궤도 위에서 쳇바퀴를 굴리기는 것이 여간 지겹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 날은 여전히 속도 6단계로 달리기를 도전해 봤다. 달리기를 하자 나를 넘어뜨리려는 새로운 힘의 축이 나타났다. 수평축은 나를 떨쳐내고 싶어 안달하는 트레드밀의 힘이었고 새로 등장한 세로축은 뛰어오르는 몸을 잡아 끌어내리는 중력이었다. 고꾸라질 것 같은 기분으로 두 힘을 이겨내며 뛰기를 1분 30초가 넘어가자 숨 쉬는 방법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들숨에 날숨을 날숨에 들숨을 뒤죽박죽 섞어 쉬며 가까스로 2분을 채우고 속도를 확 줄여 숨 고르기를 했다. 심박이 169까지 치솟으며 10분 가까이 숨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뒤로 총 운동시간 30분을 넘기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강도를 늘려갔다. 한 번 뛰고 나서 숨이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한 번에 2분씩 뛰고 5분 정도 숨 고르며 걷는 걸 총 세 번까지 늘렸다. 경사도를 조금씩 높여 10%까지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났다. 현재 속도 8단계로 한 번에 2분 30초씩 세 번 뛴다. 가끔 컨디션이 좋은 날은 숨이 남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더 뛰지는 않는다. 야금야금 기록을 늘려가는 재미를 붙이는 중인데 무리하면 흥미를 잃기가 쉽다.

어떤 날은 옆에서 같이 뛰기 시작한 여성이 내가 트레드밀에서 찹쌀떡처럼 철퍼덕 떨어지는 걸 구경하기도 했고, 어쩌다 2분을 채 못 버티고 뛰기를 멈추는 청년을 만나기도 했다. 운동은 자기와의 싸움이지만 기적처럼 나보다 못 뛰는 사람을 만나면 은근히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나를 보며 속으로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본다.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운동을 간다. 평생 땀 안 나는 체질인 줄 알았는데 땀 흘릴 만큼 몸을 쓰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수건이 앞뒤로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트레드밀과의 전투를 치르고 돌아올 때면 보람차다. 목의 통증도 많이 줄어들었고 뜻밖에 배에 근육 골이 생겨나고 있다.

모든 일의 발단은 계란이었다. 계란도 사러 못 가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집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덤으로 한능검 1급이 굴러 들어왔다. 몸이 아프다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운동을 시작했기에 통증이 사라지고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이렇게 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딱 한 발 내디뎠더니 줄줄이 달려온 일들이다.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선물이 이렇게 클 줄이야.


늘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달리기를 한다. 하이라이트의 Fiction을 듣다가 양요섭의 솔로 애드리브 대목에 이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아직은 3분 40초짜리 Fiction을 완곡할 때까지 뛰지 못한다. 올해 안에 완곡할 수 있길 소망한다.

Just keep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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