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평소 좋아하던 김범준 물리학자가 자신의 연구실 문을 닫는다는 인터뷰를 하는 걸 보았다. 연구비가 삭감되어 현재 연구실에 있는 학생들의 인건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져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자에게 담담히 사실을 전하며 ‘자기를 애처롭게 보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두 눈을 감았다. 얼마 전부터 동네 큰 사거리에 걸려있는 플래카드가 머릿속에서 펄럭였다.
‘R&D예산 6000억 증액 확정’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씨발.
대학 때 전공학과를 살렸으면 아마도 공업기술자가 됐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배운 걸 써먹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닌 기초과학분야에서 공부하는 과학도들은 미래가 더 불투명하다. 밥벌이의 불확실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건 과학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읽힌다.
결실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지난한 연구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들이지만 연구실과 현실은 차원의 문을 하나 열어야 될 만큼 멀다.
대학교에서 학생상담을 했었던 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인문 사회계열 학생들보다 자연 공과계열 학생들이 좀 더 상대하기가 쉬워. 따질 줄 몰라.”
법, 절차, 형평성, 공정성 등등에 하나하나 시비를 걸고 싸워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 내는 일 언저리에 과학자들이 얼쩡대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일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과학자 출신 정치인이 드물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침묵하는 집단의 운명은 짓궂게도 정치가 결정한다.
그들이 연구실에 들어앉아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연구한 결과물은 개인의 영달을 넘어 사회가 받아먹는다. 사회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부류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으로 과학에 대한 투자를 하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내 밥그릇에 밥을 담아 준 것도 미래세대의 먹거리를 만들어 줄 것도 그들의 역할임을 알기 때문이다.
과학계 연구개발비가 천문학적으로 깎였다. 진행 중이던 연구들에서조차 눈뜨고 코 베인 마당에 새로운 연구는 언감생심 꿈꿀 수 없게 됐다. 실제 연구와 개발에 쓰이는 비용은 고사하고 전기세 따위의 인프라 비용조차 내지 못해 빚이 쌓이고 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해진다.
카이스트의 과학수재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길이 끊어지는 걸 목도하고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거 꿈일까?
정부가 다음 해 봄에 뿌릴 씨종자까지 털어먹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한 거라면, 앞으로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