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찔끔 났다. 죽을 똥을 싸며 2시간 동안 책을 읽느라 완전 녹초가 돼버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기분은 운전을 배웠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너무 오랜만인 기분이라 반가워서 나는 눈물일까 하는 착각을 하기엔 수업 시간 내내 쥐어뜯어 산발한 머리가 그게 아니라는 걸 확고하게 증명해 주었다.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은 메커니즘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직관’이 헷갈리는데 ‘직관주의’를 이해해야 하고, ‘직관주의’를 모르겠는데 직관주의가 ‘다원주의’라는 걸 알아먹은 척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도를 따라가야 하니까) 그렇게 무방비상태로 다음 차례인 ‘상식적인 직관주의’에 한 방 더 얻어맞고 문단의 끝에 이르러 '정책 목표들 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어서 직관에 호소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이제 끝이 났나 싶지만, 바로 그다음 문단 첫 문장에서 ‘직관은 원칙들 간의 우선성의 규칙을 정해주지 못한다’는 정반대 구절을 맞닥뜨려 어질어질해지고 만다.
그렇게 내내 조리돌림을 당하다 보면 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발걸음만큼이나 영혼도 함께 터덜터덜거리게 된다.
나는 원래 분이 나면 우는 사람에 속하니까 어쩌면 며칠 전부터 정의론을 읽으며 머리에 김이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옛날 그리스 사람 중에는 분이 난다고 우는 사람이 없었던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분노에 관한 미덕들 중에 나 같은 이는 쏙 빼놓아서 분이 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섭섭하기 그지없다.)
동네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만 당장 스타벅스 앞으로 오라고.
밤 9시까지 풀가동해 허기진 뇌에 뭐라도 들이부어야 했다.
알쓰에 카페인마저 취약한 한심한 몸뚱이 때문에 늦은 밤 시간에 고를 수 있는 메뉴는 한정적이다.
평소에 전혀 안 먹던 달고 색이 예쁜 것이 당겼다. 너무 오래전에 한번 먹어봤던 연한 한려수도 바다 색깔에 톡 쏘며 치약 맛이 나던 음료가 기억났다. 프로페셔널한 직원이 내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쿨라임을 만들어줬다.
취해서 똑바로 걷지 못하는 남편을 한 손으로 붙잡고 쿨라임을 쪽쪽 빨며 집으로 향했다.
“와, 때려치울까?"
내일 술이 깨면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할 진심을 남편이 툭 털어놓는다.
“나도 그만 집어치울까?”
무의식 중에 한숨과 함께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공부가 성에 안 차서 울어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1 다음에 2, 2 다음에 3이라고 남편에게 야무지게 잘난 척을 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정작 자신은 1,1,1,1 계속 제자리걸음 중인 게 분해서 그렇다.
울 집에 있는 본분이 학생인 누구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 父가 우는 갱년기를 겪는 것보다 母의 증상이 더 심각하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이번 책도 완독을 하긴 할 것이다. 그 정도의 의지는 아직 남아있다.
매번 철학서를 공부하다 보면 꼭 마지막에 작가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이유는 (자신이 너무 사나워 보일 수 있으니)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겠다.
비틀비틀 걷는 남편에게 기대 같이 비틀거리며 걸으니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