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의 쓸모
외출 후 집에 돌아온 지희의 얼굴이 어두웠다. 식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는 점차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정말 바이러스라면...... 그녀는 위험한 생각을 떨쳐내기라도 할 듯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꼼짝 않던 그녀가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퇴근을 알려와 허둥지둥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기계적으로 저녁을 먹으며 주원은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업무를 머릿속으로 자꾸 되새김질했다. 20년 넘게 장기근속 사원인 그는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직원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해 우수사원으로 뽑힌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생전 하지 않던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상사의 지적에 앞서 본인이 이미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오늘은 어땠어?”
“어, 똑같아. 매일 그렇지 뭐.”
“몸은 어때?”
“그냥 좀 피곤해, 계속.”
지희는 입안에서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다. 저녁 내내 무심하던 주원도 평소랑 다른 분위기를 알아챘다.
“무슨 일 있어?”
“앞집에 그레고르 말이야.”
“갑자기 행방이 묘연하다던 아들?”
“오늘 앞집 부인을 만났는데, 집을 나간 게 아니더라고.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어.”
앞집에는 한 부부가 아들,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별로 왕래가 없는 사이지만 몇 년 전 아들이 취직을 했다며 이웃들에게 떡을 돌린 일과 여동생이 음악대학 진학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전해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들이 통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니 집을 나간 것 같다고도 하고 뭔가 말 못 할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간 회사 일로 너무 바빴대. 매일 지쳐 쓰러져 자서 제대로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하더라고. 그런데 한 날은 아침에 출근 시간이 지나도 방에서 나오질 않더라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방문을 열었는데......”
지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표정에서 읽히는 불안감이 그에게도 전해졌다. 몇 번의 재촉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벌레로 변신해 있더래.”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거야. 내가 몇 번 집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잖아.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 그게 정말이었다니. 그리고 가끔 역한 냄새도 났었어. 알고 보니 그래서 그런 거였어. 사람만 한 벌레라니, 아니, 벌레가 된 사람이라니. 아, 말도 안 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간 가족들이 비밀이 새나갈까 전전긍긍한 이야기, 그레고르를, 아니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돌보며 점점 지쳐간 이야기, 그러다 그레고르가, 아니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다친 이야기, 그리고 어제 그레고르가 벌레인 채로 죽은 이야기까지.
“오늘 부부와 딸을 마주쳤어.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것 같더라고. 아들은 함께 가지 않느냐고 하니까 당황하며 자리를 뜨더니 곧 부인이 되돌아와서 내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거야. 나한테 왜 이런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놓느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한 줄 알아?”
‘바이러스예요. 전 확신해요. 우리 아이는 지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돼 병에 걸린 거예요. 일종의 직업 노예병 같은 거죠. 몸속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조금씩 천천히 그레고르를 갉아먹다가 결국 돌연변이를 일으킨 거예요. 당신 남편에게도 전해요. 해고를 무서워하며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변신하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해고와 변신 중 어떤 게 더 무서운 일일까요? 전 이제 홀가분해요. 바이러스가 우리 가족 모두를 해치진 않았으니 이보다 다행일 순 없죠.’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식은땀이 연신 흐르고 가슴이 갑갑해왔다.
“당신, 요즘 들어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잖아.”
그녀의 맞잡은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괜찮다고 아내를 달래 놓고 복잡해진 머리를 식힐 겸 샤워를 했다. 거품 밑으로 옆구리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온 것이 만져졌다. 더듬는 손끝을 따라 척추를 대칭축으로 좌우 세 개씩, 총 여섯 개의 돌기가 불거져있었다. 며칠 전부터 잘 때면 등이 배기는 느낌이 있었지만 대수롭잖게 여겼다. 자세히 보려고 등을 거울에 비출 때 마침 아내가 수건을 채워 넣으러 욕실에 들어서다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단말마의 비명이 공기를 갈랐다.
주원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지희 옆에 앉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얼마 전부터. 통증이 없어서 별거 아니라 생각했어. 바쁘기도 했고. 이렇게 커진 건 오늘 발견했어.”
“병원에 가보자 당장.”
“그래.”
“여보, 당신 괜찮을 거야.”
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침착하던 주원도 덩달아 떨었다.
“나, 회사 그만둬야겠지?”
“당연하지. 바이러스나 퍼뜨리는 회사 따위 개나 줘버려.”
“당신 괜찮겠어? 내가 회사 관두고 돈을 못 벌면?”
그녀는 지난 독서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쓸모가 없어졌을 때 사랑은 증명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장자는 무용의 쓸모를 말하지 않았나.
"너는 나의 쓸모고 나는 너의 쓸모야."**
지희를 껴안는 주원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우리 서로에게 무용한 존재라서 소중하단 걸 잊지 말아.”
*영화 무빙의 등장인물 : 지희, 주원
**무빙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