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소심이는 오늘 하루도 힘차게 살았답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는 문구점이 2개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또또와 문구점'을 애용했는데,
이유는 문구점 주인아주머니가 소위 '인싸'셨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주특기는 초딩들에게 말 걸기. 학교 끝나고 문구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초딩들에게 신상 불량 식품을 하나 쥐어주면서 말을 건다.
"오늘 조립 비행기 잘 만들었어? 튼튼하게 잘 만들었네~ 그래서, 내일 준비물은 또 뭐야?"
100원을 투자해 내일의 준비물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저 센스란! 초딩들은 공짜 맥주 사탕이나 꾀돌이에 신이 나 준비물을 술술 얘기하고, 다음 날 또또와 문구점에는 내가 필요한 준비물들이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또또와 문구점 아주머니의 성격이 부러웠다. 다른 사람과 소통해야 인생이 성공하는 구나를 그때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그렇다면 지금의 '아싸'라던가 '인싸'라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 내 목표는 또또와 문구점 아주머니가 되는 것.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생활 기록부에 '활발한 성격을 가진 쾌활한 아이'가 적히길 꿈꾸는 소심이.
기린 얼굴이 그려져 있는 노란색 샤프는 또또와 문구점의 베스트셀러였는데, 한 반에 4-5명 정도는 그 샤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반에도 나를 포함한 5명 정도가 그 샤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예쁜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날의 청소 시간. 수업이 모두 끝나고 선생님이 오실 때 전까지 깨끗하게 교실을 청소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예쁜 친구가 울음을 터트렸다. 바닥에 앉아 펑펑 우는 친구 옆에는 샤프나 지우개, 형광펜 등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샤프가 없다고!! 누가 가져갔어 내 샤프!!"
그렇다. 예쁜 친구의 기린 샤프가 사라진 것이다. 책걸상을 모두 뒤로 민 채 청소를 하고 있는 상태라 교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기린 샤프는 보이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선생님이 그 친구를 달래 집으로 보내긴 했지만, 친구의 물건이 사라졌다는 것 자체가 우리 반의 큰 이슈였다.
기린 샤프 실종 사건이 있던 다음 날, 쉬는 시간에 그 친구가 나를 은밀하게 불렀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와 단 둘이 마주한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큰 두려움이었다.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사이에 그 친구가 내뱉은 말은, "너 그 기린 샤프 어디서 났어? 언제, 어디서 샀는지 얘기해봐. 내 거랑 똑같잖아. 너 이거 교실에서 주은 거 아니야? 그동안 네가 이 샤프 쓰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나를 조용하게 불러내던 모습과 달리 복도에 나가자마자 짜증 한 가득 터트리는 모습에 가슴뿐 아니라 다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내 심정과 달리 목소리는 작고 떨렸다.
"또... 또또와 문구점에서..."
"뭐라고? 크게 얘기해 봐"
"또또와... 문구점에서 샀다고..."
"이거 얼마였어? 진짜 네가 산 거야? 진짜지? 알겠어. 근데 내 거랑 진짜 똑같아서 그래"
기린 샤프가 수제품도 아니고, 문구점에는 똑같은 기린 샤프가 몇 박스쯤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우리 반만 하더라도 3명의 친구가 그 샤프를 쓰고 있었다. 억울했다. 하지만 또또와 문구점에서 샀다는 이야기 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대처 방법은 그 친구와 싸우는 대신, 나의 최애 템 중 하나였던 기린 샤프를 들고 다니지 않는 방법이었다. 억울한 감정도, 나는 도둑이 아니라는 말도 나 혼자 생각하고 감당했다.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때의 감정이 또렷하게 생각나는 것을 보면, 학교 생활 통틀어 가장 억울한 순간이었던 건 틀림없다)
기린 샤프 사건 속 내가 지금의 나였다면 엄마를 학교에 데려오거나, 선생님에게 내 억울한 심정을 얘기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도둑으로 몰린 그 상황에서 억울하게 입 다물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과 풍파에 맞서 싸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격은 바뀐다. 아니, 바뀔 수밖에 없다. 또또와 문구점 아주머니도 살다 보니 그런 성격이 된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소심해도 괜찮다. '인싸'가 부러워서 애써 나를 부정하지 말자. 진부한 얘기지만 직접 겪어보니 이 말이 가장 마음 편한 위로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라는 생각을 가지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때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