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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하다 May 14. 2019

자기소개, 인생 최대의 난관

자기소개를 할 바엔 여기서 확 쓰러져버릴 테다

신문방송학 전공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전공과목 ‘아나운싱’


'경찰청창살쇠창살’과 같은 발음 교정부터 아나운서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 앉아 뉴스 대본을 읽는 등 전공과목 중에서 실무에 가까운 과목이다. 당시 나는 치아교정을 하고 있었던 터라 수강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점수를 잘 주신다는 친구의 영업에 넘어가 수강하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 시간, 맨 앞 줄에 앉아 아나운서가 된 나의 멋진 환상은 교수님의 첫마디에서 와장창 부서졌다.


"그럼 맨 앞 줄부터 자기소개해볼까요?”


뭐 얼마나 강의를 열심히 들을 것이라고 맨 앞줄에 앉았을까… 과거의 나를 반성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0.00001초의 순간까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얼굴 다 아는 동기들이 대상인지, 처음 보는 교수님을 향해 소개해야 하는 건지, 기숙사 몇 동 몇 호에 살고 있다는 것(?)까지 얘기해야 하는 건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자기소개와 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같은 존재이다. 중학생 즈음이었을까, 미국식 교육을 추구한다는 영어 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 반 담당이었던 교포 선생님은 "한 사람씩 일어나서 발표해 볼까요?”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첫 수업 시작 전, 책상을 이어 붙여 동그랗게 만든 후 선생님은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시켰다. 앞으로 담임이 될 테니 친하게 지내자는 의의였다. 우리 반은 총 6명이었는데, 수줍게 소개를 하는 친구들과 몇몇 장난 섞인 소개가 이어지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웃지 못하고 있는 단 한 사람, 나만 빼고.


심장은 콩닥거리고 이렇게 이야기할까 나도 장난을 좀 섞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릿속은 폭풍이던 찰나, 드디어 내 차례.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이 호명됨과 동시에 누가 머릿속 삭제 버튼이라도 누른 듯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어버버 거리며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있자 선생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뭐라도 말해봐” 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자 기어가는 개미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게 선생님을 더 자극시킨 것 같았다. 어느새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선생님은 “말할 때까지 자리에 앉지 못할 거야” 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12개의 눈빛이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심장은 터질 듯하고, 팔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차라리 여기서 확 쓰러져버릴까?



14년 인생 중 최고로 무거운 시간을 보낸 다음 내뱉은 말은,


"못하겠어요”


공포의 자기소개 시간 이후, 스스로의 쪽팔림에 못 이겨 곧바로 반을 옮겨버렸다. 학창 시절 인생 최고 굴욕의 순간이었다.


대학생의 나는 똑같은 시간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 자기소개 시간을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자기소개라니…


동기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목소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는 자기소개 시간을 싫어합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특기나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저는 소개할 만한 게 없거든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지금도 이렇게 목소리가 떨리잖아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과거 영어학원에서 그랬듯, 무거운 분위기가 피부에 닿았다.


속으로 망했다…를 오백 번쯤 되뇌고 있을 때, 내 머릿속을 반짝이며 내리치는 교수님의 말씀.


“저는 학생을 처음 보니까 학생의 나이나 사는 곳도 궁금해요. 음…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것도 궁금하고요. 지금 여기 있는 동기들도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사소한 거라도 알려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순간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이 분이 아닐까 싶었다. 흥미로운 친구를 만났다는 듯한 눈빛이 느껴지긴 했지만, 교수님의 응원에 힘입어 떨리는 목소리는 안정을 되찾았고, 일주일에 3번쯤 라면을 먹는다는 TMI(Too much information)와 함께 자기소개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소심한 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야 한다는 건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가볍게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걸 어차피 이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자기소개나 발표를 앞두고 있는 소심이라면, 내가 이걸 잘해서 눈에 띄어야겠다는 결심은 하지 말자. 내가 자기소개 시간을 두려워했던 이유가 내 말 한마디로 인해 주변 사람을 웃겨 보겠다거나, 똑같은 자기소개를 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무난한 게 최고다.


그럼, 소심이들의 성공적인 자기소개 시간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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