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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01. 2017

습관적 거짓말에 무너진 신뢰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샤워를 한 뒤 문득 생각나서 손톱깎이를 찾았다. 예컨대 냄비나 프라이팬 같으면 부엌에 있을 것이고, 베개라면 침대 위나 이불장 안일 것이다. 그러나 손톱깎이라면 얘기가 달라져서, 이 년 이상 사귄 그녀의 집이라 해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시다 슈이치 ‘열대어’를 읽다가>



일요일 늦은 밤 10시 하루 종일 미뤘던 샤워를 했다. (왜 일요일엔 잠자기 전에 샤워를 하게 되는 걸까) 물기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말린 뒤 TV 앞에 앉아 티슈 한 장을 깔아 놓고 손톱을 깎았다. 내친김에 발톱까지 깎았다. 자를 때가 되지 않은 발톱은 조금 아렸지만 깔끔해졌다. 릴랙스가 필요했다. 출근해서 이 글을 쓰는데 짧아진 손톱이 닿는 노트북 자판의 촉감이 나쁘지 않다. 이 산뜻함과 반대로 지난 주말 아니 어제, 크리스마스 당일엔 분노와 빡침으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친정 엄마가 15년 만에 이사를 했다. 내가 대학생 때부터 살았던 집이고 언니가 아이를 낳고 분가를 하고 나 또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엄마 혼자 그 집에 쭉 혼자 살았다. 그러다 얼마 전 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결정하고 내친김에 인테리어 공사까지 하기로 했다. 누군가 한 명은 맡아서 스케줄도 챙기고 조명이나 타일을 고르는 등 공사에 소소하게 신경 써야 해 우리 가족 중에 내가 그걸 맡았다. 그냥 다들 귀찮다고 해서 제일 어리고 만만한 내가 맡은 거다. 그렇게 엄마 집 인테리어 상담받으면서 2년 전 이사할 때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우리 집 싱크대 문짝도 교체할 생각으로 문의를 했고 스케줄에 지장이 없어 새 싱크대 문짝 디자인과 컬러를 정하고 엄마 집 싱크대 들어가는 날 우리 집도 함께 공사해주기로 약속한 게 4주 전이다.


스스로 만든 분노일지 모르지만

서론이 길었는데, 아까부터 하려던 그 빡침의 주인공이 바로 그 인테리어 업체 사장이다. 생각해 보니 그가 여태까지 나와 했던 약속 중 제대로 지켜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테리어 공사라는 게 약속의 연속이다. 나도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니 그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줄 수 없고 서로 시간을 맞춰 일을 진행해야 한다. 지금부터 하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내 추측이다. 그 추측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르지만 나는 거짓이라고 확신한 다음 글을 쓴다. 그러니까 이 분노는 그가 아닌 내가 만들어서 이렇게 피곤해진 거다.
그가 나에게 했던 첫 번째 거짓말은(내 추측이라는 걸 한번 더 말한다.) 장모가 쓰러졌다는 말이었다. 인테리어 상담할 때 이런저런 이야길 하던 중 치매에 걸린 장모를 모시고 산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3주 전 주말,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에 못 나갈 것 같다며, 장모가 쓰러져 병원에 가고 있다고 했다. 덩달아 깜짝 놀란 나는 그러시냐며 그럼 다음에 뵙자고 다급히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도배장판을 마무리 짓기로 한 날짜에 시공이 다 돼있지 않아 연락을 해보니 자신이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있다고 했다. 아프다는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몸조리 잘하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그는 기골이 장대하다. 약골처럼 보이면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쓰러질 사람이 아니라 쓰러트릴 사람처럼 생겼다. 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생긴 걸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 그렇게 생겨도 약한 사람은 분명히 있으니까. 이사 날짜는 다가오는데 공사가 반도 진행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전화로 어떻게든 제 날짜에 마무리 짓겠다며 어제는 직원이 과로로 쓰러져서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며칠 후 이사를 이틀 앞두고(당연히 그 사이 엄마 집 싱크대가 들어가는 날에 맞춰 우리 집 싱크대 문짝 교체도 해주겠다던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 집이 급한 건 아니니 재촉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나 친정엄마가 현장에 가보았더니 도배장판 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마무리 중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얼마 전에 사장이 쓰러졌다면서요?라고 물었고 그 직원들은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소리냐며 그는 스키장에 놀러 갔다고 하는 게 아닌가? 너무 바빠서 과로로 쓰러졌다는 사람이 스키장에?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뭔가 사정이 있겠지 싶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illust by 윤지민


지난주 화요일, 공사는 완벽히 마무리되지 못한 채 엄마는 이사를 했다. 다른 공사에 비해 기간이 짧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미뤄진대 화가 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까지 마무리 지을 거냐 물었고 그는 다음 주 안에 마무리 짓겠다고 자신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집 싱크대는 언제 가능하냐 물으니 다음 주 일요일이면 된다고 했고(말하는 낌새가 그때까지 싱크대 문짝은 제작에 들어가지도 않은 듯했다) 인테리어라는 게 꽤 설레는 작업이라는 걸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도 2년 내내 맘에 들지 않았던 싱크대 문짝을 바꾼다는 생각에 괜히 흥분되고 잠도 안 왔는데 어쨌거나 차일피일 미뤄지긴 했어도 일요일엔 작업된다고 했으니 약속 다 비워놓고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토요일 밤 10시경 그에게 문자가 왔다.(사실 나는 이 일을 예상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 없는지…)


‘아들이 자전거 타다가 사고가 나서 지금 병원에 가고 있습니다. 내일 전화하겠습니다.’


이번엔 아들이었다. 나는 답장도 하기 싫었다. 아들이 사고 난 건 그의 사정이다. 고객과 약속을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꾸 연기하는 게 괘씸하고 열 받았다. 직원을 거느리는 사장이니 본인이 못하면 직원을 보내면 될 것이다. 내가 공짜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제값 주고 하는 공사인데 왜 이렇게 매번 그의 사정을 봐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쯤 되면 그가 한 모든 말들에 진실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거다. 약속한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늦더라도 오늘 꼭 와주세요. 매번 시간을 정해놓고 어긴 게 도대체 몇 번쨉니까? 사장님이 못 오시면 직원이라도 보내세요.’


제법 단호박으로 보냈다. 그는 답장이 없었다. 그가 오기로 했던 시간은 오후 2시였다. 그것도 교회 갔다 온다며 미룬 시간이었다. 2시가 넘어 4시가 되었을 즘 나는 남편에게 전화해보라고 했고 남편이 그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는 아들의 수술 경과만 듣고 갈 예정이라고, 오늘 가겠다고 했단다. 아들이 수술했다는데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더하겠냐며 남편은 오늘 오긴 온다니까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는 그 이후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없이 오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내 시간과 기대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만일 그의 아들이 정말 자전거 타다 사고가 나서 심각한 상태라면 내가 이렇게 화내는 게 도리에 어긋난 것일까? (사실 나는 그에게 제대로 화도 내지 않았다. 아직까진.) 그런 일이 있다면 약속을 한 나에게 먼저 연락해 오늘은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고 얘길 하던가 다른 직원을 통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들이 진짜 자전거 사고가 났다 해도 그에 대한 나의 신뢰는 지난번 스키장 사건에서 이미 무너졌다. 나는 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에게 무한한 분노 이상의 열 받음을 느낄 뿐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종종 봐 왔다. 살면서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과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심각한(때로는 이렇게 가족을 팔아서. 그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 핑계부터 대기 시작한다.) 거짓말이면 간단히 어길 수 있다고 판단한다. 자신의 거짓 고통이면 상대방의 시간쯤 아무렇지 않을 거라 믿는다.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도 걸핏하면 약속을 어겼다. 약속해놓고 잠수를 타버린다거나 약속 몇 시간 전에 늘 아프고 일이 생겼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같은 경우라고 단정 지을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의 시간과 만남에 대한 기대를 아무렇지 않게 저버리는 수법에 너무 화가 난다. 그렇다고 그 말이 진짠지 아닌지 내가 뒷조사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머릿속이 분노로 터질 것 같은 지금, 이 빡침의 끝이 오기나 할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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