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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11. 2017

거창할 필요 없다,
소박해도 전달될 수 있는 카피

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 분투기

정말 긴 연휴를 보내고 출근했다. 일 년 전부터 기다려온 5월의 황금연휴였지만 뿌연 미세먼지와 끝없이 날리는 송홧가루 탓에 창문도 활짝 열지 못하고 답답하게만 지냈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일주일 내내 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 것 같아 후회스럽기도 하다. 19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남겨놓은 월요일, 아이가 낮잠을 자는 사이 업무 메일을 확인했더니 기획전 관련 요청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열어 보니 여름과 관련된 침구, 인테리어 기획전이었다. 일단 당장 급한 건 아니니 회사에 출근해서 처리하기로 하고 오늘 아침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여름과 관련한 기획전이 쏟아질 시기가 곧 돌아온다. 이번 기획전에서 담당 엠디의 걱정은 아직은 대놓고 여름이라 말하기 이른 감이 있고 ‘인테리어 기획전’이라고 쓰기엔 다소 딱딱한 어감이 걸린다는 것. 그렇다면 소설의 힘을 좀 빌리면 부드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내 컴퓨터 문서 폴더에서 소설의 밑줄을 필사해 놓은 파일 중 ‘여름’이 들어간 책을 검색해 보니 약 스무 권 정도의 책이 검색됐다. 물론 모두 쓸 수 있는 메모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여름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만 추린 거니까. 그래도 일단 이렇게 뽑아 놓은 다음 마음이 가는 제목의 소설을 골라 클릭한다. 제목을 보면 자연스럽게 내용이 떠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쓸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번에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이 걸렸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가(표지가 살짝 귀엽긴 하다)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던 소설. 어쩜 이렇게 얇은데 좋은 말만 가득할 수 있지? 한 권을 통째로 필사해 놓고 싶다, 생각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첫 소설이었다. 20대에 그의 소설을 읽고 한 동안 뜸했던 나로서는 뭔가 성숙해진 작가의 필체가 느껴졌던 책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호기심이 생긴다면, 음… 일독 권유 지수 별 네 개 드리겠다. (다섯 개 만점) 파스텔톤 컬러의 표지만 보고 말랑말랑할 거라 예상했다면 오해다. 꽤 깊이 있는 내용의 소설이다. 나는 읽고 나서 한번 더 읽어 보고 싶어져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물론 읽어야 할 책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다음으로 패스했지만.


이런 소설에서 내가 건진 문장은 그리 대단한 문장이 아니다. 아주 소박하고 그냥 쓱 지나칠 법한 내용이지만 나는 이 문장을 메모해 놨고 이번 기획전에 응용할 생각이다. 작성해야 할 타이틀은 총 3가지. 메인 타이틀, 서브 타이틀 그리고 각 카테고리별 소 타이틀이다. (소 타이틀 3개)
보통은 메인 타이틀을 소설에서 참고하면 서브는 내가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넣고 싶은 문장이 더 있어서 서브 타이틀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소설 속 문장:
- 우리 조금 더 밝게 살자.
- 우리가 만난 여름, 한 번밖에 없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여름.

<요시모토 바나나 '바다의 뚜껑' 중에서>

짐작했겠지만 메인 타이틀은 위에 있는 ‘우리 조금 더 밝게 살자’로 할 것이다. 여기서 ‘밝게’를 그대로 쓰면 기획전 의도와 어긋날 수 있으니 이 부분을 ‘시원하게’로 바꿨다. 그리고 서브 타이틀은 아래 문장을 사용할 건데, 소설에선 두 사람이 만난 여름에 관한 내용이지만 기획전에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17년의 여름’으로 바꿨다. 매년 여름이 돌아오지만 ‘2017년의 여름’은 이번이 끝이니까, 그런 의미를 담았다.


카피:
메인 타이틀:
우리 조금 더 시원하게 살자. 


서브 타이틀:
당신과 내가 함께 할 여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17년의 여름.
더 시원해질 수 있어요.


‘이렇게 깊은 뜻이!’ 할만한 거창한 타이틀이 좋을 때도 있지만 소박하게 써도 충분한 의미 전달이 가능한 기획전이 있다. 시원하게 지내기 위한 침구와 소품을 보여주기 위한 기획전이라면 있는 그대로, 비비 꼬지 말고 시원하게 살자, 라고 말해 보는 건 어떨까? 단순해져 보는 거다. 결과물을 놓고 봤을 때 이런 문장을 굳이 소설에서 찾을 필요 있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 찾지 않고 이런 문장을 써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빠른 시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감도 오지 않을 때, 단순한 기획전 같은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소설의 힘을 빌리라는 거다. 그리고 수많은 문장 가운데 내가 필요한 걸 찾아서 넣고, 내용에 맞게 응용하는 것 또한 카피라이터의 자질이다. 이는 평소에 책을 많이 읽고 메모해 놓는 노력이 필요한 노동이기도 하다.


다시 기획전으로 돌아와서 메인, 서브 타이틀 외에 카테고리별 소제목은 이렇게 썼다.


-침구>> 덮을수록 시원
-인테리어 소품>> 복잡할 것 없이 포인트 하나면 충분 
-청소기>> 깨끗해서 마음까지 시원한 청소

(실제 기획전 페이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클릭)


침구의 ‘덮을수록 시원’의 경우 리넨이나 시어서커 침구를 말하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 기획전 준비하며 알게 된 정보인데 열대야가 심할 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덮지 않는 걸 선호하지만 까슬까슬한 리넨은 덮을수록 시원해 여름 이불로 불리기도 한다. 청소기의 경우 청소해서 시원해질 수 있는 ‘마음’을 강조했다.


“꿈을 이루느니 어쩌니 하지만, 하루하루는 정말 소박하게 지나간다.”


바다의 뚜껑에 나오는 이 문장이 이번 기획전 타이틀을 명료하게 한 줄로 설명하는 듯하다. 즉 대단할 필요 없다, 소박하고 진실되게 베베 꼬지 않고 풀어서 쓰면 고객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글에서 언급된 상품은 에디터 개인의 선택으로

해당 브랜드나 담당 엠디의 추천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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