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이 글을 지난 토요일 발행할 예정으로 미리 작업을 해두고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토요일 오전부터 남편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너무 잘하는 거다. 물론 내가 감기몸살에 걸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긴 했으나 짜증 한 번 안 내고 집안일을 하고 애 밥까지 먹이는 통에 이 글을 주말 동안 올리지 못했다. 미안해져서. 사람이 살다 보면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그런 거란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주말이었다. 그런 의미로 이 글을 발행한다. 이 글은 남편이 '못 할 때' 쓴 거다.
책을 읽다 보면 ‘아, 내가 쓰려던 내용인데!’라며 탄식을 내뱉게 되는 글이 있다. 얼마 전 읽은 요조의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에서 이 부분이 그랬다.
“진짜 나는 이종수가 내가 이거 해, 저거 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 아침마다 청소기 돌리고 빨래통 채워지면 세탁기 돌리는 게 다인 줄 아는 것 같다. 세탁기에 낀 물때를, 수염 깎고 나면 세면대에 떨어진 수염 가루들을, 설거지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배수관 안에 시커멓게 곰팡이가 끼는 것까지를 볼 줄 알았으면 한다. (중략) 오늘도 토스트로 아침 먹고 샤워하면서 세탁기 돌리고 냉장고 비워서 남은 채소랑 김치 찌꺼기 몰아넣고 된장찌개 한 솥을 끓여 한 끼니씩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어놓고 젓갈 다 먹은 통을 버리지도 않고 방치해놔서 곰팡이 슬어 있는 거 싹 다 정리하고 온갖 곳에 묻어 있는 고양이 털과 먼지를 닦아내고…
그러다 내가 써야 할 원고와 내가 읽어야 할 책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콱 솟았다. 왜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건지. 왜 내 눈에만 보이는 건지. 왜 종수한테 이거 치워라, 저거 치워라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지.”
아 진짜 요조, 아 진짜 요조. 너무 내 맘 같잖아.
살림을 하다 보면 울컥을 넘어서 울화통 치미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사실 예전에도 글에 썼지만 남편과 나는 살림의 스타일이 달라서 그냥 서로의 살림 테크닉에 대해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바라보는 편이다. 그런데 말이 좋아 바라보는 편이지 난 그냥 내가 참고 마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쓰면 이 글을 보는 그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겠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하고 넘어가야겠다. 남편은 나의 잔소리에 아주 질린 사람이다. 최대한, 가급적 잔소리를 안 하려고 참고 있지만 답답한 걸 어쩌겠나, 나 혼자 하려니 억울한 걸 어쩌겠나.
오래전에 유부남 직장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쓰레기 버리는 일에 대한 게 나왔다. 그들은 무조건 일반 쓰레기, 재활용, 음식물 쓰레기는 다 자기들이 갖다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버리기도 한다고 했더니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왜 남편이 안 하냐면서. 그들이 좀 지나치게 애처가들이기도 했지만, 알아서 쓰레기 버리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지금 생각해도 좀 의아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 날 보는 그들을 향해,
“왜 그런 눈으로 봐? 마치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라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맞아, 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 뒤로 나는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우면서,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버리면서 괜히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 말을 듣지 않았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마치 남편과 내가 (살림에 대한) ‘딜’을 잘 못했다는 듯 대했던 그들의 눈초리가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집안일은 먼저 본 사람이 치우는 게 맞다는 이야길 들은 후 나는 내가 봤으니 내가 치우고 있지만 왜 내 눈에 보이는 게 이렇게 많고 그의 눈엔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런 것.
욕실 세면대에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물 때. (이 핑크빛을 오래 방치하면 거뭇하게 변한다) 욕실 변기 및 커버에 제 멋대로 튄 오물의 찌꺼기. 거품을 물로 가시지 않고 그대로 마르게 두어서 생긴 거품 찌꺼기. 그리고 싱크대에 끼는 물때며 배수구 커버를 들춰내면 보이는 까맣게 낀 곰팡이 때들. (대체 그건 어떻게 치워야 하는 걸까) 어제는 아이 목욕을 시키고 욕조를 걸어 놓는데 욕조 밑동에 물때가 끼어 있는 걸 보고 기함해서 바로 고무장갑을 끼고 세제를 뿌려 닦아냈다. 아이가 변기를 쓰면서부터 걱정돼 변기를 수시로 닦는데, 그것도 아예 내 일이 되었다. 더 이상 남편에게 변기를 닦아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잔소리한다고 뭐라 하니까. 아이의 밥을 먹여주거나 재우는 일이 '주로' 내 몫이 된지는 오래다. (대부분 아이 밥을 먼저 먹이지만 동시에 세 식구의 밥을 다 차렸을 때 내가 밥을 먹이면서 아이 밥도 먹이는데, 밥을 먼저 다 먹은 그가 알아서 좀 ‘내가 애 밥 먹일게’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덜 속상할 것 같다)
냉장고와 냉동실에 계속 방치된 음식물들. 분명히 더는 못 먹을 거란 걸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 건 왜 꼭 내가 치워야 하는 거지? 냄비에 남은 국이나 찌개는 또 어떻고. 뚜껑을 열어봤을 때 쉰내가 나면 그걸 버리고 닦아야 하는 게 맞는데, 왜 그런 건 내가 다 치우고 있는 걸까? 이쯤 되면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인식을 못하는 건지 보고도 자신의 일이 아니란 생각에 내가 치울 때까지 기다리는 건지. 이불 커버를 벗겨서 세탁소에 맡기는 문제도 그렇다. 내가 하기 전에 왜 그가 먼저 하지 않을까? 세탁된 커버를 씌우는 건 또 어떻고?
요조는 책 말미 에필로그에 그의 남자 친구 종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랑하지만 주로 답답하고 미워하다가 미안해지는 종수에게 고맙다.”
나는 또 한 번 무릎을 탁, 쳤다. 내가 남편에게 느끼는 마음이 딱 저렇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점은 ‘사랑하지만’이 아니라 ‘주로 답답하고 미워하다가’에 찍힌다. 나는 아주 답답해 죽겠다. 그렇다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지만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니 날 잔소리꾼 마누라로 만든 그가 미워 죽겠다. 뭐든 좀 알아서 해줄 수는 없는 걸까? 그가 움직이는 패턴까지 봐가며 잔소리를 하는 나를 짜증내 하기보다 안쓰럽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그도 같은 직장인이다. 나도 널브러져 있고 싶은 거 참고 일어나서 움직이는 거고 더러운 거 참고 치우는 거다. 욕실 변기 닦고 개운해지는 맛에 하는 게 아니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