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주 가끔 원장님이나 담임선생님이 “어머니 잠시만요…”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이때 너무 긴장된다. 애가 친구를 때렸나? 내가 뭘 빠트렸나? 아니면 아빠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어머니 잠시만요’하는 그 짧은 사이 나는 오만 가지 생각에 빠져든다. 2주 전 퇴근 후 부랴부랴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 벨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노크하고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니 선생님이 아이 이름을 부르며 “엄마 오셨네~”라고 하신다. 그 사이 나는 현관 신발장에서 아들의 운동화를 꺼내 내려놓았다.
“어머니 5분만 시간 좀 내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원장님께서 온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시며 한쪽 무릎을 세우시고 현관에 쭈그려 앉으신다. (보통 이런 자세로 현관에서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엉거주춤 내려앉는다. 서로 바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진 않는다)
“무… 무슨 일이세요?”
“아니, 다름이 아니라 혹시 재능기부 좀 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순간 아, 뭔가를 잘못한 건 아니구나 싶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어린이집 공지사항에 재능기부가 가능한 어머님, 아버님들의 참여를 기다린다는 글을 보았는데 그 이야기인가 보다. 딱히 내가 할만한 재능기부는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원장님 말씀을 들었다.
“어머님이 글도 쓰시고 하니까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좀 읽어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시간은 한 30분 정도면 충분해요.”
“동화책이요? 에구… 저는 글을 쓸 줄은 아는데… 재미있게 읽어줄 자신이 없는데요…?”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저 집에서 OO이한테 읽어주시는 것처럼 하면 돼요. 저희는 어머님이 오시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니까요.”
원장님의 사람 좋은 미소로 나를 온화하게 바라보시며 부탁하시는데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OO이가 친구들 앞에서 엄마를 자랑스러워할 생각이 불현듯 스치자 ‘해야 되나?’ 싶었다. 어쩌지… 하며 쉽게 오케이를 날리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언제가 괜찮으세요?”라고 날짜를 확정 지으려는 선생님.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날짜는 회사 스케줄을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하게 된 ‘재능기부’가 이번 주 금요일이다. 그날은 어린이집에서 하는 OO이의 생일잔칫날이기도 하다. 부담은 배가 됐다.
집에서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듯이 하면 된다고 하는 그 일이 200명 앞에서 강연하기 전보다 더 긴장된다. 진짜다. 고작 열명 남짓되는 2-3세 아이들 앞에서 동화책 한두 권 읽어주는 일이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이것도 마음을 좀 내려놔야 할 텐데.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나는 아이 낳기 전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줘야 하는 그 시간보다 내 책 읽는 시간이 더 간절해질까 봐. 어쩌면 그게 당연하다. 아닌가? 내가 이상한가? 어쨌든 나는 아이보다 내가 우선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내 시간이 더 소중하다. 남들은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아이에게 책도 많이 읽어 줄 거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내 책 읽는 시간은 금쪽같은데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은 재우기 용도에 그치고 만다. 일단 소리 내서 연기를 섞어해야 하는 게 버겁다. 그럴 때마다 목은 갈라지고 삑사리(?)도 나고 하품은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 물론 오래전에 아동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봤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으나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조건 과장된 표현으로 뭔가를 일러줘야 하는 건 내성적인 내게 적잖은 부담이었다. 하지만 내 아이니까 미친척하고 가끔은 목이 쉬면서까지 읽어주기도 한다. 아이는 역시 좋아한다. 또 읽어 달라고 한다. 나는 딱 3번 읽으면 더는 군소리 없이 잠을 자도록 방침을 세웠다. 아이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엄마는 그런다면 정말 그런 사람이란 걸 아이도 알아야 한다.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무슨 책을 읽어줘야 할지 고르지 못했다. OO이 에게 읽어준 동화책 중에 반응이 좋았던 몇 권이 추려지긴 했다. 나름 재능기부라고 하는 건데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앞선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가기 싫어지겠지. 그러고 보니 그날 아이 생일잔치를 하니 생일에 관련된 동화책을 읽어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생일 관련 동화책을 검색해 본다. 아, 나는 또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