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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03. 2018

메모 남기는 마음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5월로 접어들었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벌써부터 여름이 지나가는 게 아쉽다. 여름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너무 오버한다고? 맞다. 그만큼 여름을 좋아한다. 5월부터는 하루하루 가는 게 아쉽다. 요즘 부쩍 화가 난다. 이렇게 푸르르고 화창해졌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밖을 나갈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민다. 동료들과 이런 이야기를 간혹 주고받다 보면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심하다 보니 아이 씻기는 일에도 민감해지게 된다. 나갔다 오면 손부터 씻기고 세수도 해줘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나부터 귀찮으니 그냥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이상하게 손부터 찝찝하다. 얼른 씻고 싶다. 결벽증 환자처럼 물티슈로 수시로 손을 닦곤 한다.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픽업해 언니네 들러 저녁을 먹고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집에 오는 시간은 밤이 되고 아이는 차에서 잠들기 일쑤다. 완벽한 엄마들은 애를 다시 깨워서 씻겨 재우겠지만 나는 아이가 잠들면 쾌재를 부르며 혹여 깰세라 조심조심 아이를 침대 위에 눕히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 거실 소파에 털썩 무너진다. 오늘만은 애를 재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시간이 얼마 많지도 않은데 괜히 공돈이 주운 것마냥 신난다. 


이렇게 아이를 씻기지 못하고 재운 다음 날이면 남편보다 먼저 출근하는 나는 준비를 마친 뒤 거실 창 손잡이 옆에 포스트잇에 쓴 메모를 붙여 놓고 나온다. (메모를 여기에 붙이는 이유는 남편이 일어나서 반드시 창문을 열고 전자담배를 피우기 때문이다) 메모의 내용은 이렇다. 


‘여보 OO이 세수하고 꼭 치카 시켜서 어린이집 보내’


물론 전날 잠들기 전에 남편에게 말해뒀음에도 불구하고 까먹을 까 봐, 남편이 못 미더워서 메모를 남겨 놓는 것이다. 메모는 거의 매일 붙여 놓고 나오는데, 씻기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런 게 있다. 


‘냉장고에 우유 있어. 그거랑 식빵에 잼 발라서 먹여 보내’

‘오늘 도서관 견학 가는 날이야. 9시까지 등원해야 한데. 늦지 마’

‘일어나자마자 쉬 하겠냐고 물어봐. 응가도’

이렇게 자잘하게 메모를 남겨놓는 나도 참 대단하고 이미 전날 잔소리로 한 차례 듣고도 메모를 또 남겨놓는 것에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시키는 대로 다 해주는 남편도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허기사 좋게 생각해서 그렇지 일일이 메모를 남기는 것도 그리 속 편한 것만은 아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시키는 대로 다 해주니 이번에는 알아서 좀 잘 해줬으면 싶은 것이다. 이렇게 일일이 코칭하듯 말해주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남편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할지도 모른다. 나는 말하지 않고 견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내 잔소리 없이도 잘 할지 못할지를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는 너무 생각이 많고 잔소리가 심한 반면 남편은 너무 느긋하고 여유롭다. 가끔 그가 시키지도 않은 걸 해 놓았을 때 깜짝 놀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다음부터 여유를 갖고 지켜봐 주는 게 아니라 조급한 건 똑같다. 나는 이렇게 메모를 매번 남겨놓는 나를 돌아보며 내가 그를 믿어주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몇 번 데어 봤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나온 나만의 그를 다그치는 방법이 메모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메모를 써놓고 나왔다. 어제도 아이가 차에서 잠드는 바람에 씻기지 못하고 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보, OO이 꼭 세수랑 양치시켜서 보내’


괜히 ‘사랑하는’이라고 쓰고 뒤에는 하트도 그려놨다. 펜 뚜껑을 닫으며 괜히 착잡한 마음이 들어 생각했다. 

내일부턴 그를 좀 더 믿어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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