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미 Jul 06. 2018

다이렉트로 일 주지 마!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아시다시피 나는 온라인 편집숍에서 글을 쓴다. 에세이처럼 장문의 글을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짤막한 카피도 자주 쓴다. 보통은 이렇게 일을 한다. 커머스 엠디들과 내가 공유하는 시트가 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 그 시트를 가장 먼저 확인한다. 엠디들이 걸어 놓은 기획안 링크를 하나씩 체크하며 타이틀을 수정하거나 새로 쓴다. 나는 나름 굉장히 신성하게 이 업무를 해나가는데 무엇보다 내가 쓴 카피가 이미지로 만들어져 공개될 때의 쾌감이 좋기 때문이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옆 사람도 나와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 그는 디자이너이자 팀을 꾸려나가는 리더이다. 대부분이 관리 업무지만 가끔 그도 작업을 할 때가 있다. 또한 그는 우리 회사에서 나에게 유일하게 다이렉트로 일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당연히 부부니까 그럴 것이다. 보통은 간단한 카피 작업이라 할지라도 내용을 적어 메일로 보내는 게 순리지만 그는 메신저로 바로바로 나에게 일을 준다! 게다가 재촉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더 안 써지는데) 자꾸 빨리 쓰라고 말한다. 사장님도 나에게 빨리 쓰라고 하는 법이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남편: 구매금액별 사은품 증정 이벤트를 할 건데 카피 좀 써줘. 

나: (이렇게) 갑자기? (일을 주는 거야?) 

남편: 좀 확 와 닿게 안될까? (내 대답은 안중에 없고 혼자 떠드는 중) 

나: (반쯤 포기) 내용이 뭔데?

남편: 구매 금액대로 청소기나 공기청정기 혹은 토스트기… 이런 걸 증정하는 거야. 자동 응모 방식으로. 

나: 알았어 써볼게. 근데 나 밥 좀 먹고. (점심 직전에 일을 주냐!)

남편: ㅇㅇ


점심을 먹고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그가 “카피 좀…” 하면서 2차 재촉을 시작한다. 나는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했던 작업에 일단 옆에 있는 책을 마구 들춰가며 이것저것 써서 보내주지만 그는 탐탁지 않아한다. 서너 개의 카피를 써줬지만 결국 맘에 들지 않는지 이렇게 말한다. 


남편: 그냥 건조하게 갈게. (당신이 쓴 건 못 쓰겠다) 

이에 발끈한 내가, 

나: 건조하게 간다고? 그럼 내껀 축축했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발끈하며 대화가 끝날 때마다 담부턴 다이렉트로 주지 말고 메일로, 정식으로 줘!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는 또다시 메신저로 ‘저기 여보’라고 말을 걸며 자연스럽게 일을 넘긴다. 이렇게 내가 쓰는 카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보니 정식으로 주는 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그가 요청한 업무에 답 메일을 보낸 뒤 긴장한 채 어떤지 물어보면 그가 “좋아”라고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맘 편할 수 없다. 


남편과 나는 한 회사에 다니기 전부터 비슷한 계열의 회사에서 일했고 나 또한 과거 편집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많은 시너지를 주는 게 사실이었다. 그가 내 카피를 보고 오글거리니 다시 써라,라고 솔직히 말해주는 것처럼 나 또한 그의 디자인을 보고 더 분발해야겠다느니 에지가 없다느니 같은 멘트를 날려 그를 혼란의 늪으로 확 밀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남편이 디자인한 페이지가 굉장히 잘 빠지면 내가 다 우쭐해지지만 다소 실망스러울 땐 왜 이렇게밖에 못했을까? 하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카피가 잘 나온 페이지를 보면 역시 우리 마누라,라고 칭찬하지만 다소 기대에 못 미칠 때는 마치 내 일처럼 괜히 찜찜할 것이다. 어찌 됐건 이게 다 우리의 밥줄이 달린 문제라 그럴지도! 



*남편은 얼마 전 이직을 했고 나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다. 훗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것도 안 해서 좋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