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카피 쓰는 이야기를 담은 <문장 수집 생활>에 이어 일상 공감 에세이 <그럼에도, 내키는 대로 산다>를 출간했다. 연이어 두 권의 책이 나오자니 기쁘고 신나는 것보다 약간의 민망함이 따라붙기도 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두 권의 책은 1년 반 전에 비슷한 시기에 출간 계약을 했었고 이미 원고가 다 나와 있는 상태라 출간 시기 또한 비슷한 것뿐이었는데... 민망하다곤 했지만 사실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좋은 게 더 크다. (재미있는) 카피 이론서에 가까운 <문장 수집 생활>과 에세이는 출간 후에 전해지는 평이나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또 하나 경험한 게 있으니 바로 굿즈 제작이었다. 요즘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들어가면 책 보다 굿즈가 먼저 보이는 게 현실이다. 에코백이나 텀블러를 샀더니 책이 딸려 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출판계에서는 굿즈에 힘을 싣고 있다.
약 2주 전 <그럼에도, 내키는 대로 산다>의 담당 편집자를 통해 굿즈를 제작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템은 아이스 보틀로 투명한 본체에 책 표지에 들어간 일러스트가 1도로 인쇄되고 약간의 카피가 얹히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실물을 받아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훨씬) 예뻐서 굿즈의 매력이 이런 거군, 하고 새삼 깨달았다. 출판사에서 택배로 내 책의 굿즈를 10개 보내줬다. 일단 나 하나 갖고 나머지는 양이 많지 않은 관계로 몇몇 사람에게만 나눠주기로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로 전날 내 두 권의 책을 서점에서 직접 샀다며 싸인을 받으러 온 우리 회사 디자이너 Y였다. 근무하는 층이 달라 자주 보진 못하지만 마음이 잘 맞는 동료로 이번 기회에 따져보니 참 오래 함께 일하기도 했다. 여하튼 메신저로 Y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따로 내 자리로 불러 아이스 보틀을 건넸다.
Y가 아이스 보틀을 가져간 뒤 30분쯤 흘렀을까? 메신저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사진은 회사 테라스로 추측되는 장소로 아이스 보틀에 시원한 물을 담아 싱그러운 연둣빛 나무 아래에서 제대로 찍은 사진이었다. 폰으로 찍은 게 분명할 테지만 아주 제대로 찍은 제품 사진 같아 보였다. 너무 감동한 나는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함과 동시에 어쩜 이렇게 사진을 잘 찍었냐고 감탄 섞인 질문을 던졌다. 사실 나도 신간의 굿즈가 나왔으니 점심시간에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밖에서 찍을 생각이나 시원한 물을 가득 채워서 찍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저 빈 보틀을 손에 살짝 쥐고 찍을 예정이었다.
김은경 저자의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를 얼마 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구구절절 다 맞는 이야기를 어찌나 심플하게 적어 놓았는지 질투가 날 정도였다. 이미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던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 책 109쪽에는 ‘단어들이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꼭지가 있다.
“이는 글을 쓸 때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가가 그 글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거든요. (중략) 당신이 이 글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느낌을 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당신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당신이 선택한 단어들에서 우러나오겠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평범한 단어는 평범한 느낌밖에 전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선택한 단어가 무엇이든, 그것은 글의 인상을 좌우할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보틀을 그냥 찍으려고 생각했던 것과 Y가 물을 넣고 야외 테라스 나뭇잎 앞에서 (보틀의 뚜껑이 연두색이다) 찍은 것의 차이는 글에서 평범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과 세심하게 고른 단어를 쓴 글을 마주한 것과 비슷하단 인상을 받았다. 어떻게 찍으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지를 연구하는 것과 어떤 단어를 골라 썼을 때 더 잘 읽히고 기억에 남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SNS에 뭔가를 올리고는 싶은데 사진을 너무 못 찍어서 나는 왜 이렇게 사진을 못 찍을까, 라는 신세한탄만 했지 장소를 변경해 보고 좀 다른 위치에서 색다른 배경과 함께 찍을지는 궁리하지 않았다. 이는 글을 쓸 때 평범한 문장 안에서 어떤 단어를 골라 쓰느냐와 매우 비슷한 맹락이다. 생각하지 않고 찍은 사진은 글이 써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날마다 디테일을 지적하며 색다른 단어를 골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지만 사진 찍을 때 응용해볼 생각은 미처 못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오은”
이 문구가 인쇄된 빨간색 연필은 오래전 책을 사고받은 굿즈로 사무실 책상 연필꽂이에 늘 꽂혀 있었다. 깎지도 않은 채 늘 그 자리에 있던 연필인데 사뭇 ‘분위기’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읽힌다. 사진의 퀄리티와 인상을 좌우하는 분위기, 단어 선택에 따라 비장해질 수 있는 문장의 분위기. 이 분위기의 차이를 인식하고 다름을 연출하기 위해 고민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결과물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