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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pr 23. 2019

하기 싫은 것을 했을 때

회사에서 쓰지 못한 카피를 씁니다 

며칠 전 아침의 일이다. 다른 직원보다 이르게 출근하는 나는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지 않고 보이차를 먹기로 했다. 회사에서 판매하는 유리 텀블러를 1+1으로 구입했는데 차를 우릴 수 있는 것이라 한번 써볼 겸 해서. 한두 달 전에 형부가 중국 출장 갔다가 사온 보이차는 딱 금귤 같은 열매에 속을 빼내고 그 안에 말린 차가 들어있는 거였는데, 개별 포장된 것이 딱 봐도 고급져 보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차 우리는 곳에 이 (차가 든) 열매 하나를 통째로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잠시 후 차가 우려 지는 걸 보던 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차가 급속도로 진해졌기 때문. 급한 마음에 먼저 마셔본 언니한테 카톡으로 물었다. 


“언니, 이거 보이차 얼마큼 넣어 먹는 거야? 하나 통째로 넣는 거 맞지?” 

“아니! 그거 새끼손톱만큼씩 덜어 넣는 거야. 다 넣으면 너무 진해.”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텀블러를 보니 물은 이미 흙색으로 변해있었다. 헐, 어쩌면 좋나 싶어진 나는 일단 다른 컵에 보이차를 붓고 새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하지만 물 붓기가 무색하게 차는 점점 더 진하게 우러나왔다. 처음에 한두 잔 마시던 나는 도저히 배가 불러서 못 마실 지경이 되었고 안 되겠다 싶어서 종이컵에 보이차를 나눠 따랐다. 그런 다음 사내 메신저에 들어가 출근한 직원들을 찾아보고 메신저로 말을 걸어 보이차를 좀 마시겠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보이차 타령에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아, 다행이다 싶어 쟁반에 컵을 올려 층마다 다니며 보이차를 배달했다. 


“이거 제가 좀 우렸는데, 너무 많이 우려서...”


내가 건넨 보이차를 받는 직원들 책상에는 이미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이 하나쯤 놓여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받아주었다. 식은 후에 시원하게 마셔도 괜찮으니 버리지 말고 드세요,라고 잔소리 같은 당부를 남기고 빈 쟁반을 챙겨 홀연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 아침 텀블러로 무려 15번을 우려낸 다음에야 차의 색이 연해졌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었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름 귀한 차인데 사람들에게 난데없는 인심까지 쓴 것 같아 기분이 괜찮았다. 그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옛날 같으면 나 그냥 버리고 말았을 텐데. 대화도 잘 나누지 않던 직원들한테도 이렇게 얼굴에 철판 깔고 차를 나눠주다니.’ 


진하게 우러난 차를 보고 갈등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내가 다 마실 순 없는데. 사람들에게 나눠줘? 그렇게 생각하자 낯가리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란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안 하던 짓도 좀 해봐야 되지 않겠어?라는 판단이 앞섰다. 


하기 싫은 것을 해보자. 

그럼 내가 달라질 것이다.  

(이경미_잘 돼가 무엇이든 중에서)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이었다. 평소에 말도 잘 걸지 않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이 요구하지도 않던 무언가를 건네는 일.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해봐야지, 라는 용기가 일었다. 이런 적도 있었다. 오후 반차 낼 일이 있어 퇴근하고 집에 가기 전 백화점 지하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뭘 먹을까 하다가 만둣국을 시켰고 식사를 마친 후 계산을 도와주기 위해 카드 기계를 갖고 다가온 직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기 백화점 없어지고 뭐 생긴데요?”


그 백화점은 말일자로 영업을 종료하고 다른 업체가 들어올 예정이라는 공고를 달았는데, 어떤 브랜드가 들어오는지 궁금해진 나는 처음 마주한 직원에게 대뜸 물었다. 예전의 나라면 묻기보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을 것이다. 때로는 검색보다 옆 사람에게 바로 물어보는 게 빠를 수도 있단 걸, 더 좋은 대안이 그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단 걸 안다.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자 계산하던 직원도 친근하게 대답해주어 기분도 좋고 듣고 싶던 대답을 명확하게 알게 돼 속도 후련했다. 


안 하던 짓, 꺼내지 않던 말을 하면 내가 달라진다. 모르긴 몰라도 다음에는 이런 행동들이 더 자연스러워지고 저 사람은 까칠해, 차가워 같은 인상은 남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의 보이차를 마신 직원들이 하나 둘 메신저로 잘 마셨다고 답해왔다. 우스갯소리로 다음에도 잘못 우려서 또 달라거나 어떤 직원은 베지밀을 내밀며 잘 마셨다고, 이것 드셔 보라고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서 덕분에 아주 따뜻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라고 고마운 인사까지. 하지 않던 것,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건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모르긴 몰라도 그게 무엇이 됐든 해보는 것이 안 하고 마는 것보다는 내가 달라지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늘로 쓴 카피>

귀찮아서 안 하던 일을 해봤다. 

달라진 내가 보였다. 


*소재: 뷰티 제품, 피부관리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들. 사람들이 귀찮아서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팔 때 응용해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가 낳은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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