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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02. 2016

J에게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하이힐은 발뒤꿈치를 쳐들어올림으로써 미녀의 엉덩이를 뒤쪽으로 빼주고 유방을 앞쪽으로 내밀어준다. 하이힐은 전방지향적이고 도발적인 유방의 구조역학적 토대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를 읽다가>



    헐레벌떡 가방을 둘러 매고 현관에서 잠시 망설였어. 8센티미터 하이힐을 신을까 3센티미터 로퍼를 신을까. 옷은 뭐 둘 다 그럭저럭 잘 어울릴 것 같았어. 두 개의 구두를 놓고 한 2분쯤 주저했을까 결국 3센티미터 로퍼를 발에 꿰고 현관문을 열었지. 나는 늘 요즘 같은 날씨를 두고 온도 없는 바람이 분다고 말해. 목에 머플러를 두르지 않았는데도 살만하다. 대구는 어때? 대구는 여기보다 봄이 빨리 찾아왔겠지? 네가 자부하는 너희 집 마당에 핀 매화가 올해는 어떤지 궁금하다. 아직 피지 않았는지 SNS에 사진이 올라오지 않네.


    어떻게 지내? 3주 전 내 아들 돌잔치가 언제냐고 묻는 너의 카톡 이후 통 연락이 없었네. 너는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생각이 나더라. 어떤 날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 밖으로 단발머리 아가씨를 보면 네가 떠올라. 어떤 날은 커피빈 안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여자를 보면 네가 생각나고. 너는 단발머리에 마음이 뒤숭숭하면 홀로 커피빈에 가 페퍼민트 차를 마셨으니까. 너와 내가 한 사무실에서 가운데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하던 게 벌써 6년 전이야. 우리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늙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무슨 깡이었니, 그런 생각을 한 건. 떠올리면 웃음부터 나온다. 특별할 거라 믿었지만 우린 보통 사람들이었나 봐. 빡세게 11시까지 야근하고 회사 근처 치킨집에서 너랑 마시던 맥주가 피로회복제였는데. 그땐 일도 많았고 또 열심히도 했다. 매일 회사 욕하고 투덜대면서도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싫다, 싫어하면서도 보람을 맛볼 수 있는 데가 일밖에 없었으니까.


    너는 나보다 덩치가 컸지만 섬세했지. 세 자매의 맏언니답게 집에서 과일을 챙겨 와 나에게 먹이기도 했고 내가 타 준 아이스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날 추켜세워줬어. 너보다 잘난 게 없는 나를 늘 존중해주는 네가 있어서 나는 네가 영영 나와 함께 여기 서울에 있을 줄 알았나 봐.

    내가 너보다 한 일 년 먼저 결혼을 하고 너도 뒤이어 결혼을 하면서 넌 남편과 함께 대구로 내려갔어. 요즘도 육아와 회사 일에 지쳐 힘들 때마다 밤늦더라도 좋으니 너랑 만나서 치킨에 맥주 한잔만 기울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illust by 곽명주


    우리 어릴(?) 땐 참 멋 부리기 좋아했는데. 둘이 취향도 비슷해서 자주 가는 쇼핑몰도 공유하고 말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택배 기다리는 낙으로 살았잖니. 너는 허리를 바짝 졸라매고 밑으로 퍼지는 롱 치마를 즐겨 입고 굽이 튼튼한 하이힐을 즐겨 신었지. 자리에 앉아 주먹으로 발바닥을 퉁퉁 치는 한이 있더라도 힐을 고수하던 너였는데. 나 또한 일주일에 2, 3일은 높은 구두를 즐겨 신었지. 그때는 짧은 치마도 종종 입고 허리와 배에 딱 붙는 티셔츠도 자주 입었어. 6년이란 시간이 무색하게 흘렀어. 그 사이 너와 나는 많은 걸 포기했지. 아이 우선, 남편 우선. 뭐 다른 엄마들만큼 투철하진 않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내려놓은 건 사실이야 그치? 가끔 전화로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면 우린 왜 결혼을 해서 이런 고생을 할까, 라며 깔깔거렸는데. 결국 통화 말미에는 우리 남편 같은 사람도 없다, 애 때문에 웃고 산다 였지.


    일주일에 한번, 아니 매일 플랫슈즈만 신으면 어때. 어릴 때 많이 신어봤으니까 괜찮지 않니? 너는 얼마 전에 남편 점퍼를 샀다고 했어. 나는 화를 버럭 내며 남편 것 말고 니꺼 사! 라고 소리쳤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높은 구두를 즐겨 신으며 유행에 뒤처지지 않던 너를 떠올리니 안 봐도 뻔한 지금 너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조금 속상해지기도 했어. 우린 늘 다시 글을 쓰자, 둘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만들자, 다짐하지. 말처럼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매번 말로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런 다짐은 끝까지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젠간 하지 않겠니?


    내일은 8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출근해야겠어. 아이를 안을 때 조금 뒤뚱거릴지 모르지만 조심하지 뭐. 서로 한 공간에서 아무 말하지 않고 있는 시간도 어색하지 않은 내 친구 J야. 사방이 초록으로 물드는 초여름이 오면 아이를 데리고 꼭 네가 있는 대구에 놀러 갈게. 그때는 편하게 플랫슈즈를 신어야겠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잡으러 다니려면 말이야.
그럼 그때까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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