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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pr 25. 2016

없애는 삶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그의 첫 방문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다. 두 번째 방문이나 세 번째 방문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9월이 끝나갈 무렵에는 피르자다 씨가 우리 집 거실에 있는 모습에 아주 익숙해져서, 어느 날 저녁에는  주전자에 얼음을 넣다가 엄마에게 아직 내 손이 닿지 않는 찬장에 놓인 네 번째 물 잔을 좀 꺼내 달라고 말했다.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중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를 읽다가>



    얼마 전 정수기를 없앴다. 냉수, 온수, 정수는 물론 얼음까지 나오는 미니 정수기였다. 정수기를 없애기 전까지 아이의 분유를 탈 때 정수기는 꼭 필요했다. 젖병에 분유를 넣고 뜨거운 물을 조금 넣어 녹인 후 정수로 양과 온도를 조절했다. 물을 끓일 필요 없이 간단했다. 뿐만 아니라 수시로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온수와 얼음이 공존했으니 간편했다. 이렇게 편리한 정수기를 없앴다. 시작은 잦은 고장이었다. 너무 똑똑해진 정수기는 스스로 알아서 이틀에 한 번씩 내부 필터 세척을 한다고 했다. 근데 그럴 때마다 정수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정수에만 불이 들어와 있거나 물도 원하는 양만큼 나오지 않았다. A/S 신청을 해서 기사가 다녀간 게 서너 번. 매달 렌털비는 꼬박꼬박 3만 9천 원씩 빠져나가는데 물을 쓸 수 있는 날이 할머니 빠진 이처럼 듬성듬성 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리를 하고 간 기사는 또 한 번의 고장으로 내가 전화를 하자 특단의 조치(?)로 위약금 없이 정수기를 빼던지 다른 제품으로 교환해 주겠다고 했다.


    정수기가 없는 삶을 생각해봤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겠지만 잔잔한 불편함이 생길 것이다. 물 주전자에 물을 매번 끓여 보온병에 넣어놔야 하고 물이 떨어지지 않게 생수를 꼬박꼬박 챙겨 냉장고에 넣어놔야 할 것이다. 얼음 또한 필요하다면 떨어지지 않게 얼려놔야겠지. 시원하게 마시려고 냉동실을 열었을 때 얼음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먹은 사람이 누구냐, 며 신경질을 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정수기를 없애기로 했다. 불똥이 정수기로 튀긴 했지만 사실 요즘 들어 부쩍 집에 있는 물건들을 줄이고 싶은 생각이 컸었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고 한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 서점에는 집에 있는 물건을 버리자는 책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홀가분한 삶, 단순한 삶, 버리기, 없애기. 가장 많이 알려진 책으로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곤도 마리에의 책일 것이다. 물건을 앞에 두고 두근거리지 않으면 버리라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해결책. 정수기를 보고 설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그와 상관없이 나는 많은 물건을 처리(?)해 버리고 싶었다. 사놓고 두세 번 쓴 게 전부인 스팀다리미는 장롱 옆에 무슨 설치 미술 작품처럼 기우뚱하게 세워져 있다. 침대 진드기를 해결하기 위해 산 침구청소기는 한 다섯 번 정도 사용했을까? 그 또한 이도 저도 못할 위치에 있어 발밑에서 걸리적거리기 일쑤다. 사놓고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의 귀찮음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그런 물건 차라리 없었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었겠다, 싶은 생각이 가장 솔직한 요즘 심정이다.  

illust by 곽명주


    며칠 전에는 남편과 저녁을 먹다가 거실장을 없애보자는 얘길 나누었다. 가구마저 충동적으로 구매한 나는 갖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필요도 없는 장식장을 덜컥 사버렸다. 튼튼하지 않아 책을 꽂아 놓을 수도 없고 자태가 불안정해 화분을 올려놓기도 위험했다. 덩치는 커서 공간을 차지했고 조만간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분명 무슨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거실에 있는 6인용 테이블도 없애고 싶다. 옷장 문을 열기 무섭게 쏟아지는 옷들도 죄다 없애고 싶다.


    주말 아침 10시. 정수기 회사 직원이 와서 정수기를 수거해 갔다. 기사는 제대로 고쳐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와 반대로 나는 적잖은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싱크대 한쪽을 떡 하니 차지했던 정수기가 빠지니 주방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며칠 지나 보니 물을 끓여 분유를 타는 일도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 주전자에 팔팔 끓인 물로 타 마시는 커피는 전보다 2배 더 맛있었다. 나는 앞으로 몇 가지의 물건을 더 처리할 예정이다. 물건이 사라지자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후일담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다. 사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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